매일신문

주말창가에서-윤주태(출판부장)

1910년 8월29일 한일합방서가 발표된 날을 국치일(國恥日)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근 1세기가 지난 97년 12월3일, 우리는 IMF 자금지원 이행조건 합의서에 서명했다. 경제식민통치가 시작되는 또 하나의 국치일이었다. 보름후면 우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다시 이날을 맞이해야 한다.

어느 쪽이 더 부끄러운 날인지는 모르지만 8?9 국치일은 제국주의를 꿈꾸는 외부 침입세력에 의한 불가항력적 귀결로 약자에 대한 동정(同情)의 여지는 있었다. 그러나 12? 국치일은 그 원인이 대부분 우리 스스로가 잉태한 것으로 오히려 외부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스스로 그 원인을 찾지못해 헤매고 있을 때 외국 언론은 친절하게도 한국사회의 부패(corruption)때문이라고 꼬집어 주었다.

그렇다. 부패라면 역사적으로 이 민족을 끈질기게 괴롭혀온 저주의 주술(呪術)이 아니던가. 그래도 민족적 자존심이 있지, 다시는 이런 치욕을 경험하지 않겠다며 국민들은 허리를 졸라맸다. 그 대가는 혹독했다. 젊은 가장들은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었고 대학 졸업자는 일자리를 찾지 못했으며 저소득층은 아예 길거리로 나앉았다. 지금도 주위를 보라. 당시 쫓겨난 대기업과 은행의 간부들 중 지금 공공근로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지를. 또 서민들은 삶을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지를.

그로부터 3년후, 우리는 IMF체제를 졸업하게 됐다. 국민들은 그동안의 눈물겨웠던 내핍생활이 다시 경제성장으로 열매맺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기름값이 유달리 뛰고 있는 올 겨울 들머리에 정부는 다시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 실업자 100만이 예상되니 3년전보다 더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귀를 의심해 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분기탱천하는 마음의 불길을 겨우 가라앉히고 뭣이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같아 속을 들여다 보니 그야말로 가관이다. 경제가 본궤도에 올라 적어도 3년전 수준으로 회복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다. 경제수치 맞추기에 급급했지 내용물은 텅빈 상태다. 서민들이 빵과 급식으로 연명할 때 한쪽에서는 해외관광객이 줄을 이었고, 추위에 떨고 있을 때 백화점의 유명브랜드는 동이 났으며 고급 술집은 아예 예약하기 조차 어려운 지경이었다. 조금이라도 권력과 연관이 있는 자는 '검은 돈'과 결탁이 됐다고 단언해도 좋을 만큼 상층부는 문드러졌으며, 국민 혈세로 조성된 공적자금은 얼마나 난도질 당했는지 주범조차 찾기 어려운 형편이 됐다.

그러면 지난 3년동안 개혁은 없었단 말인가. 누굴 위한 개혁이란 말인가. 아니 개혁이 아니라 개악(改惡)을 했단 말인가. 한쪽에서 뼈를 깎는 아픔으로 부풀려놓은 돈보따리가 다른 한쪽에서는 그냥 줄줄 새고 있으니 어느 국민이 정부의 안전장치를 믿겠는가. 서민들의 코묻은 고쟁이를 팔아 부자에게 비단옷 해준 꼴이 됐으니 그 배신감에 국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정부는 다시 '최후의' '강도 높은'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개혁을 마무리 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늑대가 나타났다"는 거짓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민들은 더 이상 3년전과 같은 희생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개혁은 평소에 해야한다. 개혁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 같이 어떤 기간을 두고 행해지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당하는 쪽은 그때만 피하면 된다는 식의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고 칼자루를 쥔 쪽은 자칫 보복의 수단으로 남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기업이나 개인은 그 말로(末路)가 어떠한지를 언제든지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전통적 유교사회인 우리나라가 그나마 정체성을 잃지 않고 역사에 남아 있는 것은 유교적인 질서가 제기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유교적 질서 가운데 가장 가슴에 와 닿는 것은 맹자의 수오지심(羞惡之心), 즉 나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대목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천민 자본주의에 물든 우리사회에 수오지심은커녕 사양지심(辭讓之心)이라도 있는가. 그렇다고 서구 자본주의 정신인 근검, 절약을 바탕으로 한 프로테스탄티즘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3년전보다 더 썩었다"는 국민의 질타는 '늑대 소년' 같은 정부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경고장 같아 범상치 않을 올겨울 추위를 예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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