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위질 없이 편집 원판 그대로

감독이 편집을 마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상영시간 제한과 대중적 취향 등을 고려해 재손질된 영화가 적지 않다. 케이블TV 영화채널 HBO는 20일부터 24일까지 감독의 진심이 담긴 감독편집판 영화 4편을 방영키로 해 눈길을 끈다.

테리 길리엄감독의 85년작 '브라질'(20일 밤11시40분·국내에 '여인의 음모'로 소개됨)은 관료주의의 광기와 어리석음이 희극적 상태에 이른 사회에서 소심한 공무원이 꿈속의 여인을 찾는 모험을 그린 영화. 독창적인 영상과 블랙 유머로 빛을 발한 문제작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결말이 음울하다고 여긴 유니버설 스튜디오사가 감독 몰래 94분용으로 자르면서 주인공을 클로즈업, 영웅화한 내용으로 바꿔버렸다. 감독판은 롱 숏으로 주인공을 작게 잡아 시스템 속 인간의 왜소함을 부각시키고 극장개봉판에서 제외된 11분이 복원돼 방영된다. 당시 스튜디오의 처사에 분개한 길리엄감독은 항의성 광고를 게재하는 등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였다. 결국 1년여간 개봉이 지연된 끝에 가까스로 타협점을 마련, 상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순진한 킬러와 10대 소녀의 우정(?)과 액션으로 포장,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레옹'(21일 밤11시40분)은 당초 레옹과 마틸다 사이의 감정묘사가 잘렸으나 감독판에는 두 사람간의 러브 스토리가 곁들여 있다. 마틸다가 레옹에게 당돌하게 사랑을 말하고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내용으로 어린 나이에 불행을 겪은 소녀와 단순하고 절제된 인생을 살아온 남자가 나이 차를 넘어 사랑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사구'(22일 밤11시40분)는 우주를 무대로 인간의 갈등과 음모,복수를 담은 서사적 영화. 극장개봉판은 복잡한 구조를 135분에 압축해 무리가 따랐으나 50분 가량이 추가된 특집판이 상영된다. 그러나 추가 편집은 린치 감독의 승인을 얻지 못해 제대로 된 감독판 영화는 아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대표작 '블레이드 러너'(24일 새벽0시35분)는 수명 4년으로 프로그래밍된 복제인간이면서도 자의식으로 운명을 거부하는 리플리컨트들의 슬픔을 담은 영화. 제작사 워너 브러더스는 내용 전개가 모호하다는 이유로 리플리컨트 반군을 뒤쫓는 데커드의 해설과 관습적 해피엔딩을 추가함으로써 영화를 망쳐버렸다. 감독판은 내레이션과 해피엔딩을 들어내고 데커드의 무의식에 관한 내용을 살림으로써 다의성과 비밀스러움으로 영화의 매력을 살렸다.

김지석기자 jiseo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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