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못 마루 풍경

그저께 밤. 나는 늦은 시간까지 무대 뒤에서 보냈다.무용가 K씨의 안무 작품 '못 마루 풍경'이 공연되고 있었고, 나는 그 대본과 무대 그림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연 작품인 '못 마루 풍경'은 화가의 꿈을 가진 한 아이의 완성된 그림 그리기라는 단순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물질주의가 팽배한 이 궁핍한 시대에 예술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그 진동과 공명의 정서로 존재를 가득 채우는 예술가의 구도적인 삶과 깨달음을 담아보고자 했던 나의 산문시를 무용대본으로 고쳐 쓴 작품이다.

##가을단상

춤은 8개의 장면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무대에는 8개의 대형 이젤이 설치되어 춤의 각 장면마다 그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는 비정형 색면 추상화가 제작되어 하나씩 올려졌다. 그리고 동영상과 스틸을 따로 제작 편집하여 무대 앞쪽에 대형 캔버스를 매달고 스크린처럼 영상을 앉혔다. 춤은 밝고 가볍게, 무대 디자인은 단순하게 색채 중심으로라는 원칙을 세워 두고 진행했다.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면서 나는 특별히 인상이 깊었던 장면들을 되짚어 본다.

무대 위에서 이글거리는 빨강이 출현해 있는 동안 어머니와 아이와 새는 서로에게 몰입하고 , 휘어지며, 가깝게 다가서고 둥글게 만났다. 또 가슴 찔림으로 표시되어 무대뒤에 주홍색 캔버스가 올려지던 눈물의 장면, 그 눈물은 소금처럼 시간이 흘러도 썩지 않는 진정성을 품고 있다. 그리고 새싹의 지향점으로 제시되던 타오르는 빛의 노랑색, 나뭇잎과 명상과 청둥오리들의 분주한 몸짓들이 함께 내뿜는 초록과 파랑과 남빛의 그림들. 우리가 색채에 몰입하면 색체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휩싸이게 된다. 이 때 색채는 내부로부터 솟구치는 강렬하고 신비한 빛이다. 특히 요즘같은 가을날 나는 대자연 속에서 정서적 확장감을 느끼게 하는 색채와 자주 만난다.

##색채의 의미

고추장을 찍어 바른 듯 올망졸망 정겹게 매달려있는 홍시.

산의 맨 밑둥치까지 닿아서 온통 불덩이가 되어 있는 단풍.

은행잎의 눈부신 노랑, 울트라마린의 가을하늘, 노을 등 시간의 흐름과 함께 갖가지 색채를 구사하는 자연도 자연이지만 무엇보다도 색은 기쁨과 슬픔, 꿈과 회상, 희망과 상처, 탄생과 죽음 등 일상적 정서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더욱 큰 의미를 키워낼 수 있다는 생각도 갖는다.

지금은 사격장이 들어서서 주변 경관도 많이 달라졌지만, 봉무동에 가면 아직도 내 졸시 '못 마루 풍경'의 무대가 된 그 저수지를 볼 수 있다.

##일상적 정서 담아

못 가까이 다가가면 못물은 내 모습을 고즈넉이 비쳐 보여준다. 물가에 앉아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 세상의 가장 중심에 나를 앉혀놓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 무대 위에는 가시광선의 가장 마지막 색인 보라색 캔버스 한 개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보인다.

존재의 가장 바깥쪽에 있는 별-보라색, 그래서일까.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다고 느껴질때도 여전히 가 닿을 수 없었던 한 세계. 그것은 무엇일까. K씨의 춤일가, 아직 미완인 내 시와 그림이거나 아니면 또다른 그 무엇일까.

시 '못 마루 풍경'을 쓰던 그 해 겨울, 나는 개인전 준비로 화실에 꼼짝없이 갇혀 지냈다. 그림이 막히면 화실을 빠져나와 봉무동 못가에 가곤 했는데 그때, 어두운 못물 속에서 오색광채 솟구쳐 오르던 내 아름다운 꿈, '못 마루 풍경'을 환상처럼 보았었다.

대구가톨릭대 예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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