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회복지의 그는 '효손가정'

초교 5년인 승호(12.서구 평리동)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68)의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게 일과다. 골다공증으로 고생하면서도 누나 미정(15)과 자기를 위해 매일 종이 박스를 주우러 다니는 할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서다. 그렇지만 할머니는 부모가 떠난 승호 남매를 더 안쓰러워한다.

승호 아버지는 구두가게를 경영했다. 그러나 경영악화로 가게를 처분하게 됐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지난 97년 교통사고로 장애를 입었다. 그후 보상비 등으로 다른 사업을 시작했지만 사기를 당했다. 이 즈음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승호를 떠나 버렸고 아버지마저 이내 가출해 버렸다.

승호가 학교에 간후 할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길거리로 나온다. 정부 보조금 14만5천원을 받지만 생활비와 학비를 대기엔 태부족이다. 부양의무자인 아버지가 있다는 이유로 할머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했고 승호와 미정이도 최소한의 보조금만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폐지를 주워 하루 5천원 정도 생활에 보태려 애쓰고 있다.

명재(15.서구 비산1동)도 비슷한 사정이다. 명재는 치매증세가 있는 할머니(72)를 돌보며 살고 있다. 어머니는 4살때 가출했고 아버지는 지난 8월 원양어선을 타러갔다는 말만 들었을 뿐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아들이 있다는 이유로 생활보조금을 받지 못한다. 명재 몫의 정부 보조금 18만1천원으로 힘겹게 생활을 꾸리고 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손자녀가 함께 사는 이른바 '노손가정'이 늘고 있다. 부모의 사망이나 이혼, 가출 등으로 버려진 아이들이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함께 살아가지만 사회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대구시에 따르면 6월말 현재 소년소녀가장 216가구 314명 가운데 절반이상이 노손가정이다. 이들은 쥐꼬리만한 정부 보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만 의료비, 교육비 등을 빼고 나면 생활비는 항상 바닥이다. 부양을 받아야 하는 노인들이 오히려 손자녀를 보살펴야 하고, 어린 손자녀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힘겨운 나날을 이어가고 있는 노손가정. 이들을 위한 법적 보호장치는 아무것도 없다.

서구제일종합사회복지관 정재호 관장은 "사회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노손세대에 대한 정부나 사회의 인식이 거의 없는 상태"라며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복지정책과 후원자들의 사랑이 필요한 때"라고 말했다.

홍재봉 복지사는 "부양하지 않고 있지만 부양의무자가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지 못하거나 최소한의 보조금을 받는 경우가 많다"면서 "가구단위에서 개인단위로 보조금을 지원해 복지 혜택을 두루 적용한다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취지를 살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hoper@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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