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천보산 '화암사'궁궐사찰이었을까

지난 98년 방영됐던 KBS 대하사극 '용의 눈물'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려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천보산 회암사. 그동안 폐사로 남아있던 이 절이 지난 97년 발굴에 들어가면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발굴 결과 절터의 규모가 무려 1만1천여평. 경주의 불국사에 버금가는 대 궁궐사찰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점은 사찰의 배치가 일반 사찰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회암사 내 화계나 배수로 시설 등의 배치는 사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왕궁을 닮아있었다.

또한 청기와, 봉황무늬등 등 발굴된 유물에는 왕(王)=이나 궁(宮)=, 또는 조선국왕(朝鮮國王)=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으며 왕실과 관련된 다른 유물들도 다량 출토됐다.

9일 오후 8시 방송되는 KBS 1TV 역사스페셜 '이성계의 또다른 왕궁, 회암사'에서는 회암사터 발굴의 현장취재와 사서 등을 통해 조선시대 최대 사찰이자 왕궁을 닮은 회암사의 실체와 그 의미를 심층분석해본다.

회암사는 왜 왕궁을 닮은 것일까?

고려말 한때 전국 사찰의 총 본산일 만큼 규모가 컸던 회암사는 조선초 이성계의 스승 무학대사가 주석했던 절로 더욱 유명하다. 숭유억불의 정책을 편 조선시대 유교 이념 앞에서도 회암사는 왕사(王寺)의 대접을 받았을 만큼 이성계의 회암사 사랑은 극진했다.

그는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준 뒤에도 이 곳에서 아예 수도생활을 하며 오랫동안머무를 정도로 회암사를 마음에 들어했다. 불교탄압의 정책적 상황에서도 이성계가 유독 회암사를 즐겨찾은 이유를 추적한다.

오랜 지우인 무학이 있고 불교가 있는 회암사는 이성계에게 개국 과정에서 어쩔수 없이 흘린 많은 피와 상처를 씻을 수 있는 정신적 은신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회암사의 폐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실록 기록으로 미뤄 조선중기까지 존속하던 회암사는 16세기말 폐사돼 역사의 그늘속으로 사라졌다. 이번 주 역사스페셜에서는 조선 전기 왕들의 왕찰로서 조선시대 중기까지 불교를 지켰던 회암사의 독특한 구조와 함께 그 역사적 의미를 조명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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