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일직날 오후

학교 생활중 가장 자유로운 시간은 언제일까. 방학? 공휴일? 방과 후? 물론 이시간들이 학교 일로부터는 일단 해방을 가져다 주지만 사회생활이나 가정 생활을 고려한다면 꼭 그렇게만 볼수는 없다. 그러면 언제일까? 계모임, 길흉사 경조, 동창회, 아니면 집안일…이 모든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날, 그날은 바로 오늘같은 일직날이 아닌가 한다. 이런 시간을 일상의 최전선인 직장 한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텅빈 교무실. 창문에 비껴드는 초겨울 햇살이 점점 얇아져 가는 하오. 멀리 산밑 도로를 지나가는 차량의 행렬, 그 바쁜 군상을 바라보며 이처럼 넉넉하게 차려진 시간의 향연을 즐김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묘한 우월감마저 느껴진다. 이 때야말로 녹차 한 잔이 제격이다. 평소 여유없이 찻잔을 대할 때가 많아서 늘 죄스러웠는데 오늘에야말로 제 시간을 만나것 같다. 알맞은 시간이 용해된 차의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향기 가닥 사이로 보이는 멀리 오봉산 다섯 봉우리에 구름이 스쳐간다. 언뜻 떠오른 도연명(陶淵明)의 시구. 그 유현한 경지.

'동쪽 울타리에서 국화꽃 따다 말고 멍하니 남쪽 산을 바라보네'

오늘따라 공놀이하러 오는 동네 아이들 하나 없고, 걸려온 전화 한 통화 없다.

습성대로 2층 복도를 거닐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배어 있는 교실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자투리 밭을 바라보며 상치와 쑥갓을 정성스레 가꾸었던 퇴임한 선생님의 손길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이웃자리 선생님의 책꽂이에 홀깟 시선을 주기도 하고 거울 앞에서 낯선 '나'를 확인하기도 한다.

…어느새 낙조를 장식할, 지는 해가 속도를 더해간다. 이제 저 차량의 행렬에 묻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시간. 마음먹었던 편지 한통 끝내 쓰지 못하고 읽으려던 책의 책갈피도 그 자리에 꽂혀 있지만 그래도 마음것 자유를 허용했던 하루, 가장 여유롭고 넉넉함을 느낀 진정 '나'만의 하루였다.

경주 아화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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