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법원 '총풍사건'1심선고

법원이 총풍사건 1심 선고공판에서 오정은·한성기·장석중씨 등 이른바 '총풍 3인방'이 모의한 '휴전선 무력시위 요청'의 실체를 인정함으로써 지난 2년간 첨예한 정치공방을 낳았던 사건이 일단락됐다.

법원은 특히 이들의 행위가 '국가안보상 심각한 위협'이라고 판단, 이번 사건의 성격을 '국기문란 사건'으로 규정한 검찰 주장을 사실상 받아들였다.

법원은 11일 오·한·장씨에게 실형을 선고, 보석을 취소하고 이들의 모의사실을 인지한 뒤 은폐한 혐의로 기소된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그러나 무력시위 요청과 한나라당 지도부와의 연계여부, 배후의혹에 대해서는 "기록상 확인할 수 없다"며 판단을 유보, 상급심 재판에서 불씨로 남게 됐다◇판결 의미=사건의 핵심인 '총풍'의 실체는 인정됐다.

피고인들은 수사·재판과정에서 자주 진술을 번복하면서 무력시위 요청이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펴왔으며, 한나라당 변호인단은 안기부 고문수사에 따른 조작사건이라고 검찰의 공소내용을 반박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재판부는 "20세기말 냉전의 마지막 잔재로서 북한을 끌어들여 대선에 영향을 미치려 한 것은 피고인들이 휴전선에서의 무력시위를 이용한 긴장조성이란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범행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긴 것 자체만으로도 국가안보상 심각한 위협이며 선거제도에 대한 중대한 침해"라고 밝혔다.

무력시위 요청 자체가 엄청난 중죄인 만큼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또 수사과정에서 안기부의 가혹행위 주장과 관련해서는 "민·형사 소송이 진행중이라 직접적인 판단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히면서 변호인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나라당 지도부의 연계여부는 판단을 유보했다.

검찰은 한·오씨가 대선보고서 18건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측에 전달한 점, 베이징 출국을 전후해 이 후보 동생 회성씨와 10여차례 전화 접촉을 한 점 등에 비춰 회성씨가 한씨로부터 무력시위 요청계획을 보고받았을 '의심'이 든다며 계속 수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법원은 그러나 사건 관련자들의 공소사실에 한나라당의 연계여부에 대한 명시적인 범죄혐의가 없고 단지 '의심'정도의 심증만 간다면 재판에서 유무죄를 가려야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한나라당 지도부에 대한 사전·사후 보고여부도 포함해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권 전 부장에 대해서는 직무유기의 '범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무죄가 내려졌다.

범죄첩보를 인지한 뒤 즉시 수사지시를 내릴 지 여부는 안기부장 재량에 달려있고, 적극적으로 첩보내용을 은폐·폐기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사건 전말=오·장·한씨는 97년 11월말 삼청동 한 다방에서 만나 무력시위 요청계획을 모의했다.

'옥수수 박사' 김순권 교수의 방북과 북풍을 연결짓는 착안은 오씨가 하고 '무력요청' 아이디어는 한씨가 냈다.

오·한씨는 당시 이 후보 비선조직을 결성, 한달여간 선거운동을 벌였지만 지지율이 오르지 않자 '특단의 대책'을 모색한 것.

장씨는 그해 12월초 베이징의 북한 대외경제협력위 협력처장 리철운에게 '대선관련 요청사항을 논의할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해 12월10일 한·장씨가 베이징으로 날아가 북측인사와 접촉했다.

한씨는 아태평화위원회 참사라고 소개한 박충을 단 둘이 만나 "12월14, 15일 판문점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 TV화면에 잡히면 효과가 클 것"이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박충은 이틀후 한씨와의 접촉에서 "답을 줄 수 없다"며 거부의사를 통보, 무력시위 요청은 불발에 그쳤다.

이후 이들은 새정부 출범이후인 98년 3월 안기부의 내사착수이후 7개월만인 98년 10월26일 한·장·오씨와 권 전 안기부장이 나란히 기소됐으며, 98년 11월30일 시작된 재판은 4차례의 재판부 기피신청이 잇따르고 검찰과 한나라당 변호인단이 치열한 법정공방을 벌이는 등 적잖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