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웃-두팔.한쪽 다리 잃고 다시 선 이범식씨

경산시 삼북동 이범식(37)씨는 15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전기공이었다. 여느 사람처럼 하루 세끼 때 맞춰 밥을 먹었고 작은 일에 기뻐하다 사소한 일에 슬퍼했다. 너무도 뻔한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이어졌다.

느는 것은 지루한 하품 뿐. 잘난 사람처럼 대단한 꿈을 가진 적도 없었다. 그저 시간이 흘러 평범한 남편, 평범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삶이라고 믿었다. 삼류 드라마 같은 엄청난 변화라니? 그는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85년. 그의 나이 22세 되던 해에 기막힌 일이 터졌다. 전기공사 도중의 감전 사고. 양팔과 한쪽 다리를 잃었다. 잠깐 잠들었던가 보다 생각했지만, 친친 감은 붕대를 풀었을 땐 다리 하나가 없었다. 복잡한 전기시설을 뚝딱 설치 해내던 솜씨 있는 두 손도 잘려 나가고 없었다.

어느날 갑자기 세상 만물은 거울 속 것들처럼 허망하게 변해 있었다.

그 와중에 아버지까지 돌아가셨다. 남은 것은 심한 당뇨의 어머니와, 2남4녀의 장남이라는 가족적 상황 뿐. 세상은 그에게 골방에 틀어박혀 시간 보내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세상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장애를 받아 들이는데 걸린 시간은 일년.

의수부터 벗어 던졌다. 땀만 잔뜩 묻어 나올 뿐 물건을 집을 수 없는 의수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멀쩡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사는 일이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철학관 일이 그럴 듯했다. 그러나 그는 컴퓨터 판매업을 택했다. 육체적으로 큰 힘 들이지 않고 해낼 수 있는 돈벌이는 이것뿐이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양한 관련 서적을 독파했고, 한쪽 발로 컴퓨터 조립하는 법을 익혔다. 학원에 나가 배우고 싶었지만 그를 가르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학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몇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컴퓨터 전문가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

산재 보상금과 얼마간의 저축을 털어 가게를 차렸다. 혼자서 주문 받고 혼자서 배달했다. 하지만 역시 역부족. 정상인에게도 벅찬 일을 팔다리 없는 그가 감당하기는 너무 힘들었다. 그렇다고 종업원을 둘 만큼 손님이 끓는 것도 아니었다. 몇년을 줄곧 적자운영 하다 그만 뒀다.

방향을 바꾸자! 작년에 인터넷 산업에 뛰어 들었다. 웹 호스팅과 기획 인쇄를 전문으로 하는 작은 사무실을 열었다. 이번엔 동업자와 함께 했다. 가지고 있던 몇 푼의 돈을 먼저 사업 때 대부분 날렸기 때문.

그의 전문 분야는 웹 호스팅과 홈페이지 제작이다. 그는 남은 한쪽 다리로 컴퓨터 작업을 한다. 손가락에 맞게 고안된 키보드를 발가락으로 친다. 손에 어울리게 생긴 마우스는 발바닥으로 끈다. 그래서 그의 책상은 참 묘하게 생겼다. 낮고 널찍해 손 보다 투박한 발이 움직이기에 알맞다. 느리고 어설프리라 짐작되겠지만, 그의 발은 날렵하다. 익숙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마우스를 끈다.

"불편 하시겠어요!". 기자의 뻔한 인사말에 그는 "한쪽 발이 남아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오히려 넉살을 부렸다.

이씨의 바람과 달리 아직 웹 호스팅 사업은 성과가 변변찮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밝았다. 큰 돈은 못 벌지만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평범한 일이 만족스럽다고 했다. 망하긴 했지만 이런 저런 사업과 장사 덕분에 경험을 많이 쌓은 것도 고마워 했다.

이제 그는 장애를 이유로 골방에 머물거나 주눅 들지 않는다. 주위 도움을 거절하지도 않는다. 누군가 들어주는 커피 잔을 뿌리친다면 하루종일 커피 한잔 마실 수 없는 현실을 그는 받아들였다. 그의 얼굴은 맑고 목소리는 경쾌하다. 곧잘 바둑(7급)을 두고 소주를 마신다. 화장실 가기가 부담스러워 맥주만은 피할 뿐이다. 사고로 장애를 입은 이들은 흔히 2차 감염에 노출되기 십상이다. 우울.비관.절망… 그 지독한 전염병들은 사고를 당한 이들의 맑은 영혼까지 노린다. 그런 면에서 이씨는 승리한 전사였다.

그가 요즘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는 작업은 유라시아 레일(www.eurasiarail.com) 구축. 남북 횡단철도와 시베리아 철도의 연결을 염두엔 둔 가상공간 판이다. 이 가상 철도가 완성되면 부산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서유럽까지 연결된다.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는 꼬박 한달을 달려 로마에 도착한다. 실제와 꼭 같은 배경, 꼭 같은 영상 정보를 제공한다.

두 팔을 잃고 외다리로 다시 선 이범식씨. 그의 꿈은 안방에서 대륙을 횡단하는 것이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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