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수돌칼럼-IMF3년, 변한것도 아무것도 없다?

며칠 전 기차를 타고 서울 가는 도중에 좌석 앞에 꽂힌 국정홍보 자료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재정경제부와 국정홍보처에서 발간한 것으로, 제목은 "우리 경제, 지금 이렇습니다"이고 그 아래에 "IMF 위기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나라경제를 생각합시다"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표지를 넘겨보니 "어렵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라는 자신감을 북돋우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이어 최근 들어 체감 경기의 하락, 소비와 투자 심리의 위축, 하부구조의 취약성 등이 존재함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러나 금리, 성장률, 물가 등 경제의 기본 토대는 이전보다 더욱 튼실해졌고 외환보유고도 97년 12월에 39억달러에 불과했으나 IMF 3년만에 900억달러 이상을 달성했다고 하면서, OECD와 IMF 같은 국제기구에서도 우리경제를 건실하게 평가한다고 말했다. 결국 문제는 진행 중인 구조개혁만 조속히 완료된다면 경제가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따라서 지나치게 "위기, 위기" 하면서 '위기의식'을 부채질하면 심리적 동요가 초래되어 정말로 경제가 더욱 위기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며 IMF 위기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부실 제거'를 위한 4대 구조조정을 마무리해 '시장시스템의 확립'과 '국가경쟁력 강화'에 힘쓰자고 촉구했다.

이 홍보물의 기본 논리를 되짚어보면 첫째, 시장과 경쟁력을 위한 구조개혁은 생존의 문제로 필수 과정이니 속히 해야 하며 따라서 불법 노동쟁의나 집단이기주의는 금물이다. 둘째, "경제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 예컨대 일시적 실업은 구조조정 이후 새 고용 창출로 구제가 되니 실업을 두려워 말자. 셋째, 구조개혁 성과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고 '세계일류국가' 시대가 올 것이니 정부를 믿고 따르자는 것이다.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일류국가'로 도약한다는데 그 누가 이를 반대할 것인가?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첫째는 IMF 이후 지금까지 3년 내내 '고통분담'이니 '허리띠 졸라매기'니 하면서 모두가 피와 땀, 눈물을 흘렸는데, 또 얼마 전에 'IMF 위기'를 극복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는데, 이제 와서 또다시 '위기 상황이니 허리띠를 졸라매자'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하는 것이다. 사실 200만 이상의 실질 실업자, 700만에 가까운 비정규직·불안정 노동자, 수천명의 노숙자, 수만 명의 결식 아동·청소년, 천만명에 가까운 빈민층은 더 이상 졸라맬 허리조차 없다. 부자들이 수억 내지 수십억 연봉을 벌며 러브호텔을 가거나 최고급 옷을 걸치고 다니는 모습, 또 분단 구조를 청산하고 민주적 평화통일이 올 것이라는 청사진과 노벨평화상 수상 등이 그려내는 희망적 이미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둘째는 IMF, 세계은행(IBRD), OECD, WTO 같은 국제기구들이 촉구하는 구조조정의 본질이 결코 우리들로 하여금 "쾌적한 생활환경 속에서 누구나 원하는 만큼의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일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게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월든 벨로 등 양심적 지식인들이 지은 '50년이면 충분하다'라는 책에는 이런 국제 기구들의 본질이 폭로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제3세계 국가들이 1970년대에 선진국 은행에서 빌린 차관을 갚지 못하자 세계은행과 IMF는 구조조정을 채무지급 유예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여 제3세계의 독립성을 제거하고 이들 나라를 세계자본의 운동 공간 속으로 더욱 깊숙이 편입시킨다. 1985년 말까지 15개 채무국 중 아르헨티나와 멕시코, 필리핀 등 12개국이 이런 강제적 구조조정을 해야만 했다. 1980년대 말까지 약 187개의 구조조정 차관이 관리되었다. 결국 선진국을 순종하지 않으려던 제3세계 국가들은 '돈'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었고 탈규제화, 개방화, 수출경제화, 민영화, 긴축재정, 화폐 평가절하 등을 단행해야만 했다. 마침내 비동맹운동의 기수로서 가장 '깡다구' 세던 인도조차 부채 위기에 몰려 1991년에 구조조정을 전제로 차관을 받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박정희 이후 한국의 개발 독재도 일종의 '깡다구'였던 셈인데 이조차 마침내 1997년 'IMF 위기' 이후 꺾여버렸다. 물론 개발독재가 정당화되어서도 곤란하지만. 요컨대 세계자본의 전략은 이 지구를 하나의 시장, 하나의 공장, 하나의 이윤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한 전략에 순응하는 길이 과연 '세계일류국가'로 발돋움하는 길일까?

고려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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