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의사 김동선의 중앙아시아이야기

먼 이국 땅 황무지에 내팽개 쳐지듯 버려졌던 고려인들. 굶주림과 질병, 이민족의 학대… 한민족은 그 신산의 세월을 어떻게 견뎌 냈을까. 스텝의 마른 바람과 -20℃의 추위에도 꺾이지 않은 우리 핏줄들의 굳센 의지는 어디서 생겨났던 것일까.1937년 중앙아로 이주 당한 고려인은 40여만명에 달했다. 카자흐 12만, 우즈벡 20만. 또다른 여러곳에 8만명. 스탈린이 원동(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들을 강제 이주시키면서 내세웠던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됐다.

첫째는 원동에 그냥 살게 할 경우 일본인과 구분이 안돼 문제가 있다는 것. 당시 일본과 대립하던 러시아는 비슷한 생김새 때문에 한인들이 일본의 첩자 노릇을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중앙아에 농업인력을 공급하겠다는 욕심. 당시 중앙아 대부분 땅은 유목민만 서성거릴 뿐 그냥 놀려지고 있었다.

필자는 카자흐스탄 수도 알마아타 북동쪽 300km 거리에 있는 '우슈또베' 시에서 핏줄의 놀라움을 겪었다. 우슈또베의 뜻은 '3개의 봉우리'. 당시 이곳은 강제이주 정책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 왔던 고려인들이 도착한 사막 속의 마을이었다.

필자가 찾았을 때엔 도시 가장자리로 젖줄 처럼 강이 흐르고, 사막엔 도무지 어울릴성 싶지 않게 벼가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인들이 이곳에 강제로 내려졌을 때, 그곳은 사막일 뿐이었다. 토굴을 파고 갈대를 엮어 움막을 지었다. 살인적인 더위와 추위에 맞서기 시작했다.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키 작은 풀만 무성한 스텝의 초원에는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나무 한그루 보기 힘들었다. 널 만들 나무를 구하지 못해 가족의 주검을 설움과 함께 맨 땅에 묻어야 했다.

하지만 고려인 강제이주 1세대들은 그 척박한 사막에 물꼬를 트고 논을 만들어 냈다. 굶주림에 쓰러지는 순간에도 볍씨를 아껴 농사를 일궜던 것이다.

그곳에서 필자가 만난 동포는 인 발렌티나. 우슈또베 부시장이라는 정식 직함을 가진 동포 2세였다. 1996년 여름, 처음 순회진료 가서 만났을 때 그녀는 까만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는 시골 아낙으로 보였다. 그러나 시청에서는 깐깐하기로 소문난 억척 아줌마로 통했다. 곱상한 외모와 달리 그녀의 추진력은 웬만한 남자를 능가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우슈또베 고려인 연합회 회장'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녀에게서 우선 놀라운 것은 유창한 한국말 솜씨였다. 선친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라고 했다. 러시아로 유학했다가 결혼 후 귀향, '고려 혼 지키기'로 요약될 열정으로 평생을 매진, 오늘날 그곳을 "한민족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된 도시"로 불리게끔 만들었다고 했다.

그 덕분인지 우슈또베에서는 명절이나 결혼잔치 때 거의 한국 토박이 음식들이 차려지고 있었다. 증편이라는 떡과 순대와 국수가 나왔다. 잔치 때는 으레 국수를 말았다. 시원한 국물에 갖가지 꾸미를 얹어 정을 나누고 있었다. 육수를 많이 쓰고 양념이 조금 다른 등 맛은 한국에서 먹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지만, 먼 이국 땅에서 젓가락으로 국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필자에게 반가운 충격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인 발렌티나 같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었다. 그곳 동포들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떡과 밥을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의 전통을 지키려 애썼다고 했다. 우리말, 우리 음식, 우리 문화가 그녀가 보전을 위해 동분서주 하는 바로 그것들이었다. 그건 또한 그 선친이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애써 노력했던 것이기도 했다.

인 발렌티나가 이미 이뤄놓은 업적은 대단했다. 여러차례 건의 끝에 정부 보조금을 받아 내 최초의 '강제이주 유민 박물관'을 만들어 개관해 놓고 있었다. 초기 강제 이주민들이 거주했던 구릉에는 그들이 살았던 토굴의 모습과 흔적을 보존하는데 성공했다. 진작에 잊혀졌을 강제이주 1세대들의 무덤 역시 덩달아 집단으로 잘 보존돼 있었다. 비석을 만들어 죽어 간 자들의 혼을 위로한 것 역시 그녀의 자기희생적 노력의 성과였다.

그곳 시립병원에 우리 진료소를 개소했을 때,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먼 곳까지 찾아준 고국의 젊은 의사에게 감사하다고, 그리고 우리가 한 핏줄임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했다. 고국에 사는 우리 모두가 오히려 그녀를 칭송해야 마땅할 것인데도, 그녀는 핏줄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눈물까지 흘리며 감사해 하고 있었다.그곳 오지 시골 마을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병자였다. 사막의 모래 바람과 소금기 많은 식수 탓이었다. 고혈압·신장병·안구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체계적 진료·투약이 필요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말없이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인 발렌티나가 더 걱정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점점 고려인에서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고려 말과 예절을 배우려 하지 않고 러시아식 풍습과 삶에 젖어 들 뿐 아니라, 대부분은 결혼도 이민족과 함으로써 그만큼 더 빨리 고려문화를 잊어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인 발렌티나는 그런 젊은이들을 무작정 타박만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 척박하고 내일을 가늠할 수 없을 만치 살벌한 남의 땅에서 사는 이들이 제 민족만을 고집할 수 없음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필자가 만났던 고려인 2세 미샤는 좋은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앞날에 대해 불안해 하고 있었다. 그가 사는 레닌스크는 카자흐스탄 땅이었으나 장기 임대 형식으로 사실상 러시아 땅이 돼 있었다. 이때문에 그곳 사람들은 곧 국적을 선택해야 할 운명에 놓였다고 미샤는 말했다. '노력 영웅'의 딸이며 공무원이기도 했지만, 미샤의 얼굴엔 불안한 빛이 역력했다. 미샤까지 그럴진데 일반 다른 고려인들의 불안은 어떨지 쉽게 짐작이 갔다.

이런 악조건이 닥칠수록 인 발렌티나는 동포들의 몸 속에 흐르는 피가 한민족의 것임을 잊지 않도록 알리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꿈에도 그리던 조국이 무엇인가를,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가를 알리는 일, 그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그녀는 믿고 있었다.

대사관과 여러 사람들 도움으로 필자는 일년에 2, 3차례 그곳 고려인들을 정기적으로 진료할 수 있었다. 고려인의 뿌리를 지키려는 인 발렌티나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어 가슴 뿌듯했다.

그녀의 두 딸 역시 어머니 못잖게 한국말 사랑에 열심이고 한국에 다녀 오기도 했다고 했다. 어머니의 뒤를 이어 본격적인 민족혼 잇기에 동참한 것 같았다. 우리에게 민족은 무엇이고 동포는 무엇일까? 여기 한국 땅에 사는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카자흐인들의 식단

유목민족인 카자흐인들의 주식은 고기와 빵이다. 지금은 도시 생활자가 적잖지만, 여전히 일년 내내 넓은 초원을 누비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가축과 천막과 최소한의 물로 삶을 영위한다.

그들을 닮아 그곳 까레이스키들도 떡이라 불리는 흘랩(빵)과 고기를 주식으로 한다. 고려인 가정엔 빵과 함께 밥도 나오지만, 카자흐나 러시아인들은 빵에 버터를 바르는데 반해 고려인들은 일반적으로 된장을 발라 먹는다.

수도 알마아타 거리 곳곳엔 '끼오스크'라는 작은 상점들이 즐비하다. 이들 상점이 공통적으로 파는 것이 흘랩. 한국의 식빵과 비슷하며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다. 이슬람 신자인 카자흐인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대신 양고기를 주식으로 한다. 그래서 이들의 식단은 온통 양고기 위주이다. 양고기로 만든 대표적 요리가 꼬지 형태인 '샤슬릭'과 국수형태의 '라그만'이다.

'꾸무스'라 불리는 마유(말젖)도 유명하다. 다른 젖과 달리 마유는 짜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쉽게 숙성돼 막걸리 비슷한 맛을 낸다. 이틀 정도 숙성시키면 5도 정도의 술이 되기도 한다. 폐결핵에 좋다고 알려져 민간요법으로 오래 전부터 전해져 오고 있다. 말고기는 비싸며, 한국의 순대처럼 말 창자로 만든 음식은 카자흐 최고의 요리로 친다.

'질로늬 바자르'는 알마아타 시내에 자리잡은 가장 큰 재래시장. 그 한 모퉁이에선 하얀 수건을 인 고려인 할머니들이 고춧가루·콩나물·두부·나물무침 등을 팔고 있었다. 때문에 풍경이 한국의 여느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서 만난 김 클라바 할머니는 자신의 성이 김해 김씨라고 외고 있었다. 하루도 빼지 않고 손자·손녀들에게 된장을 먹이고 두부를 먹인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가 죽으면 누가 우리 된장을 담글 것인지"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서 수십년을 살아온 그곳 까레이스키들, 이제는 카자흐 문화에 젖을 때도 됐지만 여전히 우리 음식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토록 우리 음식에 매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김 할머니는 "음식을 잃어버리면 영영 고향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고향 돌아갈 날이 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