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人治, 이제 제발 그만

'미국의 부시 대통령 당선자가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을 만나 자신의 선거공약인 감세(減稅)정책을 추진해달라고 당부했지만 그린스펀은 끝내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전한 외신보도는 인상적이었다.

세계의 대통령이라할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요청을 쌀쌀하게 외면한 그린스펀의 고집도 물론 대단했지만 그에게 무안을 당하고도 "그린스펀을 존경한다"고 여유를 보인 부시의 자세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별것 아닌것 같은 작은 사건이지만 자신의 직분에 대해 그리도 당당한 그린스펀과 막강한 권력을 내세우기보다 경제 전문가의 협조를 당부하는 부시의 모습에서 미국의 저력을 실감하면서 민주정치란 이런 것인가 새삼 느꼈다.

민주정치란 항상 언로(言路)가 열려있고 정치지도자들이 이를 겸허하게 수용해서 법치(法治)의 원칙따라 공정하게 집행할때 비로소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였던 것이다.

반면에 무늬만 민주정치를 내세우며 실질적으로는 법과 원칙을 외면하고 권력자 멋대로 독주하는 인치(人治)정치가 판을 치면 정치가 흔들리고 행정이 혼란스러워진다.

우리 정치가 요즘 무척 흔들리고 있는 것도 집권자들이 법대로, 행정의 원칙대로 공정하게 나라를 이끌어나가지 않고 내편 따지고 내 고향 따지는 인치에 매달린 탓이라 보아 틀림없다. 대통령과 동향이라는 사실밖에는 별다른 공적이 없는 사람을 2년여의 짧은 기간동안 3단계나 초고속 승진시키는 그런 인치의 나라에서 그린스펀 같은 공직자가 나타나서 대통령을 도와 민생을 살피고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란 서글픈 생각조차 든다.

문민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교육개혁이 그랬고 의료개혁이 또한 그러했다. 기업구조조정은 110조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도 60조원이상이 오간데 없이 회수불능이란다.

한빛은행 등 6개 은행의 감자(減資) 경우도 지난 3월까지 감자는 없다고 공언해놓고는 느닷없이 강행하더니 여론이 악화되자 소액주주 구제대책을 검토하고 있으니 국정책임자들의 무소신이 이보다 더할수가 있을까. 이처럼 정부 여당이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시행착오 투성이인 것은 정부가 뚜렷한 원칙과 합리성을 바탕으로 문제에 접근하기 보다 "대중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하는 류의 인기영합식 여론 정치에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 아닐까 싶다.

여기에다 DJ의 가부장(家父長)식 국정운영스타일까지 곁들여지면서 행정과 정치일선의 언로는 차단되고 '어른'의 뜻이 아래쪽으로 쏟아져 내려가기만하는 이른바 인치정치가 판을 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국정이 제대로 움직여질 까닭이 없는 것이다.

8조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금융구조조정이 실패하고 감자 않는단 약속을 정부 스스로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도 어느 한사람 책임지지 않다가 대통령이 책임소재를 가리라고 지시하자 마지못해 움직이는 이 현실이 바로 인치정치의 폐단이요 DJ식 가부장 국정운영의 자연스런 귀결이라 믿어진다.

DJ는 내년2월까지 4대개혁을 마무리 짓겠다며 당정을 쇄신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아래쪽의 언로를 막아버리고 대통령이 만기(萬機)를 친람하는 식의 국정운영으로는 백번 당정쇄신을 해봐야 아무래도 역부족이 아닐까 한다.

그보다는 지역과 계파를 초월해서 적임자를 발탁하고 그에게 법에 보장된 권한을 주는 한편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는 그야말로 논공행상의 원칙아래 국정을 운영해야 그나마도 무너져 내리는 경제를 붙들고 개혁 또한 가능해지지 않을까한다. 정치에는 왕도가 없다. 때문에 DJ도 자신이 정치 달인이라 스스로 자만해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독주할 것이 아니라 널리 여론을 수렴하고 중지를 모아 회생의 정치, 구국의 정치로 국가를 위한 마지막 봉사를 하기 바란다.

金燦錫 논설위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