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모의 길목에 크리스마스가 있고, 사람들은 백설이 분분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고대했다. 다행히 이번 크리스마스는 비록 넉넉하진 않았지만 모처럼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장식됐다. 혼란과 불안이 팽배한 세모의 분위기를 차가운 백설로 포근하게 만든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상실의 시간을 희망으로 채워주듯 황량한 그 길목을 지켰다.
그리고 잔설이 빚어내는 날카로운 눈바람은 엉거주춤한 지성에 메스처럼 스쳐가기도 하고 따뜻한 서정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마침 미당 서정주 시인이 난세에 메시지를 전하기라도하듯 세모에 숨을 거뒀다. '한국문학 20세기의 마감'이라는 찬사를 뒤로하고 미당은 '진달레 꽃비오는 서역 삼만리, 파촉 삼만리'를 가듯 떠나갔다. 언론에 불현듯 대서특필된 그의 얼굴은 시를 잃어버린 이 사회를 향해 울고 있는 듯 했다. 그의 친일행적, 군사정권과의 유착이 입방에 오르고 있지만 한국적 서정을 온전하게 건져올린 업적은 순전히 그의 몫이다.
시를 잃어버린 사회
우리는 대체로 중고교때 교과서를 통해 시를 접하고, 흥미를 느끼면서 시집도 사고 암송해보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그것으로 끝이다. 청년기만 넘어가면 생업의 전사, 또는 출세의 화신처럼 돌변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시는 아예 소용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만다. 그래서 사람들은 "국화꽃 피우는데 소쩍새와 천둥은 왜 울고, 가난이란게 왜 남루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냐"고 휘젓고 차라리 "개같이 벌어 정승처럼 써라"는 말을 선택한다.
개판이란 말이 그래서 나온건 아니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돈과 권세와 명예를 인생의 타깃으로 삼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일찍부터 투견처럼 물고 물리는 처절한 혼전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여느 공동체에서건 위선과 배신을 밥먹듯하는 비겁함을 비장의 무기로 삼는 개판의 속성은 당연한 질서처럼 자리잡고 있다. 그런 사회에 시가 설 자리는 물론 없다.
돈과 권력만이 존재
게다가 IMF이후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부자는 부자대로 빈자는 빈자대로 돈과 권세의 위력을 새삼 절감하면서 쉬어갈 초야도 제대로 없는 이 땅에서 입을 앙다물고 있는 상황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이 인간사회에 인간이 없는 꼴이 되어 간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부모들이 아이를 미리 정해진 일정에 따라 기획생산하듯 출산하는 데서부터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일정부분을 훼손당하고 출발한다. 유아때부터 똑똑한 아이로 만들기 위한 부모의 노력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감행되고 아이는 굳이 착한 사람이 될 필요없이 기세등등하게 자라주기만 하면 된다. 아이가 자각력과 판단력이 생길 무렵은 이미 달리는 열차에서 내릴 수 없는 것과 같이 가외와 입시경쟁에 가차없이 휘몰리고 있을 때다. 이겨야 한다는 단호한 명제를 줄기차게 주입받는데 청소년기를 몽땅 쏟아붓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물림되는 비인간적 제도와 관습속에서 인간이 사라져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따뜻한 인간미 그리워
그러나 멀지 않은 엄동설한 깊은 밤에 군고구마 한봉지만으로도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모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처럼 따뜻하고 편안했다. 벙거지모자를 눌러쓰고 영하의 강추위를 견디며 손님을 기다리는 초로의 군고구마장수. 군고구마 한봉지를 안고 부자처럼 귀가하던 가난한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줌마 아이들. 인간의 미소가 있었고 대화가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이제 없다. 지금도 군고구마를 사고 파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때 그 사람들은 아니다.
30촉짜리 백열등이 아주 차갑게 느껴지는 우중충한 선술집에서 겨울밤의 한적함을 막걸리 왕대포로 달래던 그때 우리네 풍속도에도 인간은 있었다.
어려운 경제가 새해엔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때문에 이미 IMF고통을 경험한 보통사람들에게 이 겨울은 사뭇 불안하고 암울하다. 그러나 사람들을 정작 두렵게 만드는 것은 인간부재의 적막감일지 모른다. 이웃에 따라 차가운 눈바람 속에서도 훈훈함이 입김처럼 피어나기도 하고 싸늘함이 성에처럼 쌓이기도 하는 것.
어린시절 꽁꽁 언 들녘을 가로질러 잠결에 흘려온 크리스마스 이브의 교회 합창소리가 마치 천상의 소리처럼 들렸던 기억이 있다. 가식없는 인간의 소리는 천상의 소리와 닯은 것인지. 이 세모에 단지 서정상으로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는 미당의 노래에 젖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김재열(편집2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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