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의사 김동선의 중앙아이야기

필자가 처음 진료를 시작했던 곳은 국립 아카데미 학술원 병원이었다. 의사 70여명 등 150여명이 근무하는 비교적 큰 규모. 병원장 '샤끼로바'는 40대 중반의 독신여성으로, 지독하게 공짜를 좋아하는 호흡기내과 의사였다.

진료소 개소식이 열리던 날, 이 병원장이 소리 없이 사고를 치고 있었다. 개소식 축하차 병원을 찾은 한국 대사와 우리 상사원 등에게 일일이 기부와 협조를 부탁하고 다닌 것. 대사에게는 한국 연수를, 대우전자 지사장에게는 전자제품을, 자동차 딜러에게는 승용차, 무역업자에겐 현금을 요구했다.

카자흐엔 물자가 부족해 치료에 필요한 소모품조차 환자 자신이 시장에서 구해 와야 했다. 수술에 필요한 장갑·나이프·거즈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진료실에도 물품이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병원장은 작은 것을 내놓으면서 온갖 생색내기를 빼놓지 않았다. 이것은 얼마며, 얼마나 구하기 힘든 것이다는 둥. 그녀의 이런 태도가 한국 기업으로부터 현금이나 물품을 기부 받아 오라는 무언의 압력임을 오래잖아 알게 됐다.

의사들도 박봉과 체불에 시달렸다. 필자가 아는 한 치과의사는 임금 체불을 견디다 못해 의사직을 그만두고 말았다. 대신 그가 택한 일은 운전. 우리 같으면 치과의사가 운전수 일을 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지만, 그곳에서는 낯선 풍경이 아니었다. 메스 대신 운전대를 잡은 그는 월급이 2배로 늘고 제때 나와서 좋다고 했다. 직업에 남녀차별이나 귀천이 없는 것도 전직의 한 여건이 됐을 것이다.

범죄도 엄청나다. 올 연초 귀국을 며칠 앞뒀을 때, 공짜 좋아하던 병원장 샤끼로바가 마피아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를 싫어하긴 했지만, 막상 사고 소식에는 마음이 우울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알마아타 동남쪽 50여km에 있는 '알렉산드로프카'. 인구 1천여명에 불과한 작은 시골 마을이다. 대부분은 카자흐 원주민들. 채소 농사와 목축으로 살고 있는 그 마을에 우리 동포도 한사람 있었다. 신 까피톤씨.

덩치가 유난히 컸고, 언제나 머리카락이 지저분해 영락없는 산골 사람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눌했지만 우리 말을 할 줄 알았고, 필자가 한국인이란 사실을 알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일주일에 한차례씩인 이 마을 진료를 마친 후에는 늘 까피톤의 집에 들러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재산 목록 1호는 30여년 된 고물 트럭과 큰 소였다. 차는 한번 도시 시장을 다녀오면 어김없이 고장을 일으켜 또 일주일씩이나 수리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시장 다녀오는 길엔 교통 경찰관들에게 돈을 뺏기기 일쑤였다. 매연 배출이 심하다는 이유였다.

그를 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까피톤이 소를 잃어 버렸다. 한국과 달리 카자흐에선 동네 전체 소들을 모아 초지로 몰고 다니며 키우는 목동이 있었다. 까피톤 역시 농사일로 바빠 소를 맡겨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동이 소를 잃어 버렸다는 것이었다.

까피톤의 낙심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그의 아내는 목동이 소를 잡아 고기를 팔아 넘긴 게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억울하기만 할 뿐, 고려인들이 현지인을 상대로 권리를 찾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알마아타로 돌아온 필자는 친하게 지내던 검찰청 친구를 찾아 가 그의 억울한 사연을 전했다. 오랜 수사 끝에 비슷한 피해를 당한 몇몇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결국 까피톤은 법정에서 이 일의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었다. 추측대로 목동은 여러 차례 남의 소를 도살해 임의 처분해 온 사실이 드러났다. 덕분에 까피톤은 피해를 보상 받을 수 있었다.

까피톤은 당연한 보상을 받았을 뿐인데도 무척 감격해 했다. 남의 땅에 사는 이민족이 원주민을 상대로 싸워 이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약자인 고려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저항 보다는 체념을 배워야 했을 터였다.

공공 서비스도 엉망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카자흐에서는 지방 도시를 갈 때 주로 '안토니오'라 불리는 쌍발기나, '야크'라 불리는 제트기를 이용한다. 이런 비행기를 타면 우선은 좌석의 크기에 놀라게 된다. 너무 좁아 편히 앉아 여행할 수가 없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다음에 기다리고 있다. 비행기 좌석 밑으로 기체에 구멍이 뚫려 밖이 훤히 보이는 것이다. 불안하기를 넘어 황당했다. 또 너무 낮게 날아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추락할 것 같았다. 우리의 옛날 시골 완행버스처럼 연착이나 스케줄 변경은 다반사였다.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비행기 좌석 번호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먼저 타는 사람이 임자였다. 비행기가 착륙하면 조종사와 승무원이 거들먹거리며 먼저 내린다. 그 다음에야 승객들이 내릴 수 있었다. 그래도 승객들은 아무런 불평도 없었다. 마치 태워줘 고마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일 뿐이다.

완벽한 공급자 위주의 서비스. 철저한 사회주의식 사고 방식이다. 카자흐는 옛 소련으로부터 10여년 전 독립했지만, 사회 곳곳에는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고질이 지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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