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차오! 이탈리아-관광도시 베니스(끝)

"베니스라면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몰라!" 혼자서 베니스행을 감행하는 미국 여성(캐서린 햅번 역)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여정'(1955년)은 베니스를 무척도 낭만과 사랑의 도시로 그렸다. 그곳에선 곤돌라가 유유히 떠다니고, 눈부신 태양 때문에 한순간 눈이 멀어버린 청춘남녀들이 거리 어디서나 포옹하고 애무한다. 견딜 수 없는 외로움에 빠진 주인공에게도, 구릿빛 피부에 푹 빠져들 것 같은 진한 눈빛의 라틴계 미남이 강한 시선을 던진다.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의 고향이어서 그럴까? 수많은 영화.소설의 무대로 등장하는 베니스는 사랑 이야기와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았다. 때론 너무 아름다워 죽음까지 떠올리게 하는 곳.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그렇게 지목했다. "아첨 잘 하는, 믿기 어려운 미녀와도 같은 도시, 어쩌면 동화같고 어쩌면 나그네를 유혹하는 함정같은 도시…"

베니스는 118개의 섬들과 100여개 운하, 400여개 다리로 이뤄진 물의 도시, 서로마제국 붕괴 후 알프스를 넘어 온 훈족을 피해 육지인들이 세운 천년도 더 된 도시이다. 섬으로 구성되다 보니, 차도 없었다. 기차도 섬 입구인 산타루치아 역이 종착점. 택시 대신 다니는 것은 배였다. 버스 배도 있고, 택시 배도 있었다. 옛날에는 느릿한 곤돌라가 주요 교통수단이었지만, 지금은 더 빠른 수상 택시, 수상 버스가 인기라고 했다. 바다 위 속도를 제한하기 위해 세워 놓은 시속 6, 11㎞ 등 숫자 적힌 교통표지판이 이채로웠다.

워낙 유명한 만큼 이 물나라를 찾아가는 기자 일행도 설레고 있었다. 16세기 말 대운하 위에 세워졌다는 아름다운 아치형 곡선의 리알토 다리를 지나 중심부인 산 마르코 광장에 이르니 역시 느낌이 달랐다. 온 천장과 벽면을 가득 채운 모자이크화가 도저히 인간 솜씨라고 믿기지 않는 산 마르코 성당, 카사노바가 지하 감옥에 갇혔다 탈출했다는 두칼레 궁전, 박물관 등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비둘기떼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는다고 신이 나 있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격찬했다는 곳. "독재자 무솔리니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지만, 바다 위에 다리를 놔 베니스 연결 교통을 편리하게 만든 그의 업적은 높이 살만 합니다". 일년에 서너번씩 주말을 이용해 이곳에 놀러온다는 세르지오 오솔리니씨는 무솔리니가 베니스를 좋아해 휴양지로 자주 이용했다며, 그를 좋게 생각하는 베니스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했다. 석양이 깔리자 광장 주변엔 낭만적인 정취가 넘쳐 흘렀다. 한쪽에선 피아니스트가 감미로운 선율의 연주를 시작했고, 그 옆에서 젊은 남녀가 주위 시선도 아랑곳 않고 진하게 입을 맞췄다. 어둑해져 가는 바다 위 곤돌라에서는 사랑하는 남녀를 위한 뱃사공의 노래가 흘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여행자가 꼭 가봐야 할 명소 10선 중 하나로 꼽았다는 바로 그 베니스의 밤 풍경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날이 밝자 이 도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드러냈다. 모터 보트 택시를 타고 돌아본 베니스는 마치 침몰을 앞두고 있는 '죽음의 도시'를 연상케 했다. 페인트가 벗겨져 흉물스레 낡은 건물들은 흉가 같았다. 바닥은 아예 물에 잠겨 흡사 '유령의 집'이 물에 둥둥 떠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창 밖으로 빨래를 주렁주렁 늘어 놓은 모습이 궁색해 보이기만 했다.

안내를 맡았던 마르코 테라니씨는 "안타깝게도 베니스가 물에 가라 앉고 있다"고 알려줬다. 지난 100년 사이 23㎝ 정도 가라 앉았다는 것. 산 마르코 광장이 물에 잠기는 횟수 역시 늘어, 50년 전엔 일년에 6, 7회이던 것이, 10년 전부터는 40회 이상으로 증가했다는 얘기였다.

그 광장에 높이가 1m 이상 되는 판자가 놓여있던 이유를 알만 했다. 바닷물이 범람하면 먼저 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은 고무장화로 바꿔 신은 뒤 그 판자 위로 다닌다고 했다. 소금기 있는 바닷물은 산 마르코 성당 안까지 들어가 대리석 바닥을 부식시켜 곳곳이 움푹 패 있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대리석이 아름답다지만, 우리는 그게 얼마나 약한지를 잘 알기 때문에 더이상 집 짓는데 쓰지 않습니다". 비토리오 아미고니씨는 대신 '포르피도'라는 야문 돌로 새로 식탁을 만들었다고 했다. "모터 달린 수상 택시.버스들이 일으키는 거센 파도와 물보라도 건물의 토대를 침식시키고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들은 뒤 떠나면서 뒤돌아 본 베니스는 왠지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싸늘한 겨울 기운이 감도는 회색빛 바다, 물에 잠긴 전설의 도시 아틀란티스처럼 베니스도 결국 물에 가라앉고 마는 것일까?

하지만, 도시마다 독특한 빛깔이 있어 언제나 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이탈리아가 참으로 매력적인 나라임에는 틀림 없어 보였다. 찾아 오는 이방인을 만나 또다른 문화를 접하기 좋아하는 그곳 사람들의 유쾌하고 따뜻한 마음 또한 매력적이었다. 그런 것이 어울려 또다시 찾고 싶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김영수기자 stella@imaeil.com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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