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흔 다섯살인 소설가 김영현씨는 암울한 유신정치의 70년대, 해방의 이념으로 넘실거렸던 80년대, 그리고 잃어버린 전망으로 인한 허무주의적 색채 짙은 90년대를 통과해온 세대다. 그 구비를 조금씩 다른 몸부림으로 아슬아슬, 울퉁불퉁 넘어온 그 세대 한국인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는 '어느정도 살아봤다' 라는 낌새가 느껴지는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이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속에는 기쁨과 아름다움보다 삶을 더욱 짙게 물들이고 있는 우수와 슬픔이 스치는 듯 했다. 2001년 1월1일부터 매일신문에 새 연재소설 '바람에게 물어봐'를 집필하는 김영현씨는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이 소설을 써나갈 것"이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가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지난77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수감, 강제 징집, 80년 5월 광주민주화 운동 때 보안사 지하실에 끌려가 고문에 시달렸던 '시대의 얼룩'이 제일 먼저 걸려든다. 그 얼룩, 그의 청년기의 자전적 요소들이 끼어드는 이 소설은 요컨대 '고향'을 찾아 헤매는 오디세이아의 역정처럼 세계의 어둠을 헤쳐가는 성장소설에 가깝다. 그렇다고 그 험상궂은 경력이 생경하게는 전개되지 않을 터이다. 소설의 첫머리를 봐도 일본 영화 '철도원'이나 혹은 터키 영화 '욜'(길)의 장면이 연상될 정도로 강원도 산간의 끝없이 이어지는 길은 눈으로 뒤덮여 새하얗게 적막하고 서정적이다. 그는 첫 소설집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촉발된 90년대의 유명한 '김영현 논쟁'(문학작품의 예술성과 운동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문학논쟁)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특유의 필치로 문학성과 역사성의 '기우뚱한 균형'을 모색해왔다. 그의 문학은 생경한 이념에 떨어지지도 않았으며, 더더욱 미학주의나 그를 가장한 상업주의에도 함몰되지 않았다. 평론가 김명인은 "김영현의 작품에는 자신에게 부과된 프로메테우스적 운명과 대결하는 뜨거운 정신의 초상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걸 작가는 쓰겠다고 했다. "우리가 살아왔던 세월과 삶,그게 무엇인지 정말 파헤쳐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이번 연재소설의 주제는 우리가 살아온 지난 시간의 의미를 진지하게 되묻는 영화 '박하사탕'을 떠올려 보아도 무방하다. 그래서 어찌보면 그의 소설은 감수성으로 현란하게 번득이는 90년대의 저 많은 문학에 견주어 낡은 느낌으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문학의 '과거'인지 '미래'인지는 아직 알 수 없고 다만 기대는 걸 만한 일이다. '내가 살아온 삶의 의미는 도대체 뭘까'라는 의문의 덩어리는 얕거나 깊거나 간에 누구나의 마음 속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미래의 전망은 과거에 있다는 뜻에서 '오래된 미래'라고도 하지 않는가. 원로 작가 박완서씨에게서 "그 제목 참 야하네"라는 소릴 들었다는 이 소설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나이에 걸쳐있다. 섬세한 성격의 이상주의자 정형섭, 시대의 갈등과 개인의 행복에 대한 희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형섭의 애인 정연희, 건강한 민중성과 때로 야비한 성격을 동시에 드러내는 일용직 노동자 박동식 등이다. 그는 "모든 예술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누추하고 초라한 삶에 옷을 입혀주는 일이며 한송이 꽃을 달아주는 일"이라며 격정을 거친 작가답게 말했다. 우리의 누추한 삶이 그의 글로 하여금 하나의 꽃을 달게 될 지 모두 기대를 해볼 일이다. 55년 경남 창녕 출신으로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한 그는 84년 단편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로 등단했으며 한국일보 문학상(90년)을 수상했다. 소설집 '내마음의 망명정부', 장편소설 '풋사랑' 등을 펴냈고 지금은 실천문학사 대표로 있다. 소설 삽화는 중앙대 회화과를 졸업한 서양화가 이태호씨가 맡아 섬세한 필치로 새로운 느낌을 전할 것으로 기대된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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