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해리 포터와 21세기 리더십

암스테르담 공항에도, 홍콩 공항에도 서점의 서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책은 해리 포터 시리즈였다. 29세에 이혼녀가 되어 생후 4개월 된 딸 제시카에게 우유대신 맹물을 먹이면서 아기가 잠자는 틈을 이용하여 카페에서 공원에서 탄생시킨 이 작품은 작가 조앤 롤링과 주인공 해리 포터 모두가 21세기의 문턱에서 현실에 지치고 실망한 사람에게 주는 하나의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녀는 질식할 것 같은 현실에서 해리 포터를 생각하면 따뜻해지고 행복해졌기 때문에 다른 누구를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기자신을 위해 썼노라고 말하고 있다. 다렌도르프가 말한 현실에 지치고 실망한 사람들 중의 하나인 조앤 롤링을 따뜻하게 해준 해리 포터는 바흐.니체. 스탈린.레닌으로 상징되는 20세기의 영웅들과는 다르다. 해리 포터는 내가 가는 길이 옳으니 나를 따르라고 용감하게 외치는 지도자가 아니다. 그는 두려움과 망설임과 수줍음을 보이는 우리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운 문제에 대면해서는 회피하지 않고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할 뿐 아니라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을 보여준다. 문제를 해결하고 난 뒤에도 우쭐대지 않고 우리 중의 한사람으로 조용히 돌아와서는 또 다른 도전에 대응책을 준비한다.

해리 포터가 디지털 게임에 빠진 어린이조차 책벌레로 만들고 어른들조차 '구조조정'으로 내몰리는 세계화의 벼랑 끝에서 기대게 만드는 매력은 어려울 때 초인(超人)을 기다리는 보통 사람들의 심리와, 그렇지만 영웅과 초인이 군림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기대를 잘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앤 롤링은 해리 포터 속에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로 대표되는 영웅설화, 셜록 홈스식의 추리기법, 영국의 화랑제도나 다름없는 기숙사 제도의 전통을 솜씨껏 버무리고 그 위에 그녀의 상상력을 한껏 집어넣었다.

탄탄한 전통의 토대 위에 선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 바로 지금의 현실정치가 아니겠는가. 진보적 이념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때 현실에 지치고 실망한 사람들은 강력한 영웅과 초인을 바라게 된다. 해리 포터가 끊임없이 싸워야만 하는 대상은 '초인'이 되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하는 ' 그 사람'과 '그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초인 숭배의 비극은 파시즘에서 확인된 지 오래다. 독일 노동자들에게 진보적 이념은 상처를 치유해 주는 치료제가 아니라 대안없는 권력투쟁의 도구로 여겨졌다. 민주주의의 뿌리가 약하고 진보적 이념이 대안으로 신뢰를 얻지 못하면서 독일 노동자들이 선택한 파시즘의 비극은 세기말을 앞두고도 "인생은 아름다워" " 쉰들러 리스트"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으로 영화화되었다. 이들 영화들이 끊임없이 제작되고 있는 이유는 통일 독일이 민족주의로 재무장하는 것에 대한 유태인의 두려움 섞인 의구심이 포함되어 있겠지만 다른 한편 파시즘은 비단 독일인 뿐 아니라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함정이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문제를 탈정치화한 경제주의, 세금 없는 자본주의, 노동 없는 자본주의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그에 대한 대책으로 적색( 공산주의 )이든 녹색이든( 생태주의 ) 흑색(민족주의 )이든 국민국가를 기반으로 한 보호주의가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예찬은 어디 가고 규모의 경제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은행 통폐합논의와 은행권 파업, 신자유주의와 시장의 논리를 강조하면서 강도 높게 이루어지는 정부 개입에 의한 구조조정과 민영화 계획, 지식기반사회를 강조하면서 지식생산기반을 약화시키는 교육개혁의 불안은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진보적 이념은 대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 불안 가운데 우리에게 기억되는 초인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떠오르고 있다. 교정과 교실까지 형사가 상주하고 머리카락 길이에서 바지통 넓이, 심지어는 도시락의 혼분식, 자녀수를 결정하는 일까지 책임졌던 유신시대의 강력한 통제를 때로는 향수처럼 떠올리는 이유는 우리가 해리 포터와 같은 새로운 리더십에 대한 상상력을 접었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를 만든 것이 이름 없는 여성이었듯이 언 땅에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해리 포터들이 보이고 있다. 한일회담으로 준 식민지 빚에 대한 면죄부를 무효로 만든 남북한 정신대 할머니들, 이 들 옆에서 앞뒷바라지를 묵묵히 하여 2000년 12월,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히로히토 일왕 개인의 유죄판결을 받아낸 이름 없는 여성의 힘은 바로 우리 속의 해리 포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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