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의 거리는 잿빛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회색의 안개가 자욱합니다. 어디서부터 밀려운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런 안개가 눈이 닿는 곳곳을 메우고 있습니다. 흙빛으로 말라비틀어진 가로수 가지 끝과 잎사귀는 물론, 여러가지 채색으로 단장된 도심의 고층건물도 회색으로 젖어 있습니다. 목덜미로 회색의 차가움이 저절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한해의 시작과 그 끝이 눈으로 보듯 우리 모두에게 환히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작은 보였으나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 오늘의 실상입니다. 웅성거리고 있는 것들은 불확실성으로 묶여져 있는 것뿐입니다. 낯설고 뒤틀려 있는 그런 모습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지난 1월 초순, 그때까지 잔설이 여기저기 희끗희끗 남아 있는 팔공산 갓바위를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새 백년 새 천년하며 온 나라가 눈송이 쏟아지듯 마치 복송이 터져 내릴 듯 들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산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는 빛이었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며칠 전 직장 동료와 함께 부인사 뒤를 지나 파계재로 이르는 능선을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얼었던 길이 녹아 조금은 미끄러웠지만 그때도 산은 그대로였습니다. 지난 천년을 가만히 주시해왔듯 앞으로의 천년을 또 그렇게 바라보고 있겠다는 묵시로 보였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너보다 낫다고 으스대며 꺼내어 보일 것이 무엇입니까. 누가 누구를 밀쳐내고 구획지우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좁은 단칸방에 펴놓아진 이불하나 정도 아닐까요. 첫째가 힘으로 이부자락을 끌어당기면 저쪽 막내의 힘없는 발이 냉기에 드러납니다. 또 그러다가 막내가 춥다고 이불을 끌어당기면 첫째의 어깨가 추위에 노출되는 그런 처지는 또 아니겠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내 몸 하나 건사하는데 모든 것을 던져오지는 않았는지요. 비 오는 날 골목길을 지나며 저 혼자 비를 맞지 않겠다고 남의 추녀 끝을 찾아 뛰며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한바탕 신나는 연극을 기대하면서 입장했던 우리들은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밑도 끝도 없는 공허한 구호만 되풀이되고 있는 두루뭉수리 극에 염증을 느껴 무관심 혹은 상대적 박탈감에 그냥 불을 삭이고 있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지요.
횡단보도를 자그마한 손을 치켜든 아이 하나가 지나갑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기초질서를 유치원의 어린아이에게만 강요하지는 않았는지요. 기초질서가 무엇입니까. 원칙과 순리가 아닐까요.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는 원칙이라는 곧은 자(尺)를 갖지 못한 것 같습니다. 상황과 득실에 따라 길이가 제멋대로 늘어나고 줄어드는 그런 자만 있지 시퍼런 칼날처럼 자신에게 엄격을 요구하는 그런 자는 찾아보기 힘든 오늘이 아닙니까.
순리가 무시될 때 소리가 납니다. 그 소리는 거스르는 물이 파장을 일으키듯 두겹세겹 벽을 만들고 냉소를 불러모읍니다. 탐욕은 오히려 가진 것조차 잃게 합니다. 그러나 순리가 지켜지는 것을 믿게 되면 사람들은 기다리며 인내합니다. 삼동의 추위를 견디는 것은 봄이 곧 온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10년간 선교활동을 하다 안식년으로 잠시 귀국한 선교사 아들의 입에서 나왔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그 아들의 눈에 비친 대구는 '신기한 도시'라는 겁니다. 목욕탕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더운 물 찬 물이 마음대로 쏟아지고 전화 한통에 밤이고 낮이고 없이 맛있는 자장면을 배달해주는, 여태까지 한번도 보도 듣도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여기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문제와 마주치게 됩니다. 목욕탕의 냉·온수와 24시간 열려있는 식당의 문이 무어 그리 신기한 일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한가지, 우리의 눈높이와 마음의 높이를 조금 낮추어보자는 것입니다. 끼리끼리 비슷하게 양보하고 물러서면서 어깨를 맞추어 보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통도 깎여지고 분노도 좌절도 어느정도 닳아 내릴 것 아니겠습니까.
내년은 올해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들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어려움이 경제적인 어려움보다 우리를 더 짓누르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한번 신명나는 일에 부닥치면 물불 가리지 않는 '돈내기 기질'을 갖고 있지 않습니까.
화해와 나눔은 먼곳에 있지 않습니다. 어렵고 힘들겠지만 상처받은 마음을 추스리고 서로 위로하며 회색의 모든 것이 걷힐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감사와 갱생의 정신으로 오는 새해를 맞이해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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