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비어 발본색원!' 언젠가 많이 들어본 소리다. 군부정권이 한창인 때 집단시위의 '원천봉쇄'와 함께 널리 쓰인 말이나, 정권이 바뀌면서 이들 말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유언비어'를 단속하겠다는 엄포가 등장했다. 어떤 시민은 시위대로 오인받아 경찰 곤봉에 얻어맞아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다시 유언비어의 시대가 돌아오고 원천봉쇄의 암울하던 시대가 돌아왔는가. "어와 농부님네, 이 내 말씀 들어보소!" 농부들이 뙤약볕에 등을 지지면서 논바닥에 엎드려 부르는 논매기 소리 한 대목이다. "세상천지 사람들아 이 내 소리 들어보소!" 나무꾼이 지게를 지고 눈 덮인 겨울산을 오르며 신세 한탄을 하는 초부가의 한 구절이다. 한결같이 자기 말이나 소리를 들어달라고 한다. 이때 '말씀'과 '소리'는 사연을 담은 이야기라는 점에서 같다. 그러나 소리는 말과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 아우성이다. 말이나 이야기는 '하는 것'이지만 소리는 '치는 것'이자 '지르는 것'이다. 소리는 고함이자 외침이며 아우성인 것이다.
나도 불러 보리라
'소리 없는 아우성'이 역설적 표현으로서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처럼, 소리는 단순한 의사소통 매체인 말과 달리 함께 부르고 외치는 구호이자 주장이며 노래이다. 말의 세계에서는 이 주장이 제약을 받을 때에는 유언비어로 떠돌지만 소리의 세계에서는 거침없이 가락을 타고 노래가 된다. 이름하여 민요이다. 일터에서 부르는 민요들은 한결같이 여럿이서 더불어 노래되었다. 일하는 즐거움도 노래로 불러야 신명을 제대로 풀어낼 수 있고 고난으로 점철된 불행한 신세도 타령으로 드러내야 울분에서 해방될 수 있다.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사
일러 다 못 일러 불러나 푸돗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 보리라(신흠)
시조(노래)에 대한 시조이니 일종의 메타시조인 셈이다. 노래를 지어 부른 사람은 얼마나 시름이 많길래, 말로 일러서 그 시름을 다 이르지 못하니 노래로 불러서나 풀어내 보겠다는 것인가. 진실로 내 마음의 시름을 풀어낼 수 있다면 나도 마음껏 노래 불러 보겠다는 것이다. '이내 소리 들어보라'는 나무꾼의 민요나, '나도 불러 보리라'는 선비의 시조나 한결같이 자신의 시름을 풀고 삶을 달래고자 하는 것이다. 소리는 혹 있은들 마음이 이러하랴
마음은 혹 있은들 소리를 뉘 하나니
마음이 소리에 나니 그를 좋아하노라(윤선도)
이 역시 메타소리이다. 소리의 내용과 소리하는 이의 마음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를 노래한 소리(시조)이다. 좋은 소리가 있어도 자기 마음이 소리와 같지 않으면 또는 소리를 할 마음이 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마음이 저절로 소리에 실려 나와야 좋은 시이자 소리이다.
내 노래랑 산 넘엉 가라
우리는 지금 남의 시를 외우고 남의 노래를 앵무새처럼 따라 부르는 데 익숙하다. 그 시와 노래가 내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낼까. "시라는 게 뭐냐,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배겨낼 수 없는 게 시 아니오? 입으로 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말들, 그게 바로 내 시가 되었소."우리 시대의 가장 치열한 운동가이자 진정한 시인인 백기완씨의 말이다.
내 노래랑 산 넘엉 가라
내 노래랑 물 넘엉 가라
산도 물도 내넘지 말앙
요 집 올레 지넘엉 가라
제주도 아낙들이 부르는 맷돌노래인데 일종의 메타민요이다. 내 노래가 산도 넘고 물도 넘어 가라 하다가 마침내 산도 물도 말고 집 올레(대문)나 넘어 가라 한다. 물론 내 노래는 내 사연과 시름을 담은 나의 뜻이다. '내 노래랑'은 나의 노래란 뜻이 아니라 '나와 노랠랑은'으로 나와 노래가 일체로서 노래를 타고 산도 물도 넘어가고자 하는 해방의 의지이다. 이때 노래는 시름을 푸는 것이자 나를 자유롭게 하는 해방의 소리이다. 시란 무엇인가. '똥을 앞에 두고 침묵하는 이들과, 똥을 기어이 대변으로 부르고자 하는 이들에게 똥을 똥이라고 시원스레 말하는 것'이 바로 시라고 안도현은 말한다. 시는, 고매한 척 가식의 말로 '대변'이라 하지 않고, 삶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똥'이라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똥을 두고 침묵하는 벙어리 노릇이나 이를 기어이 품위 있는 문자로 바꾸어 말하는 노릇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러나 똥을 똥이라 부르는 일 곧 시를 짓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음치도 말더듬이도 없다
노래도 마찬가지이다. 말은 제대로 못해도 소리를 제대로 못하고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이는 없다. 말더듬이도 노래할 때는 더듬거리지 않는다. 잊어버린 사설도 노래하면 생생하게 살아난다. 음치라는 말은 학교에서 음악교육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생긴 말이다. 앞소리를 메기며 소리패를 이끌어 가는 앞소리꾼이 별도로 있을 뿐 모두들 함께 부르며 신명풀이를 했다. 아무도 소리판에서 음치로 지목되어 소외되는 일이 없다. 민요는 언제나 한결같은 가락과 사설로 노래되지 않는다. 현장의 상황과 삶의 맥락에 따라 부르는 사람의 정서에 맞게 그때마다 독창적으로 노래된다. 배우고 익힌 대로 앵무새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한 상황과 형편에 따라 저마다 다른 정서와 신명으로 자기 소리를 하는 민요의 창조적 융통성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성이다. 기억되고 연습되고 훈련된 예술은 거짓 예술이다. 자기로부터 우러난 독창성이 없기 때문이다. 원래 시도 노래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현실적인 삶과 소리와 시는 늘 함께 있었다. 민요의 전통처럼 삶과 시와 소리가 하나일 때 문학은 건강했다. 김대행의 지적처럼, 노래하던 민요를 글로 옮겨놓고 시라 하면서 이를 본받도록 요구함에 따라 시와 노래의 불행한 별거가 시작되고 반민주의 문학이 생겨났다. 시는 사람들만 감동시키지만 노래는 우주만물을 감동시킨다. 소리는 모든 사물이 다 듣기 때문이다. 접속하지 않는 인터넷 사이트가 소용없듯이 들어주지 않는 소리도 소용없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자기 소리를 들으라고 야단이다.
대통령도 취임 초에는 국민의 소리를 듣겠다고 약속하고 두어 차례 대화를 가졌으나 벌써 딴 소리이다. 방송의 날에는 아예 내 소리만 들으라는 듯이 방송3사의 전파를 독점한 채 자기 소리만 일방적으로 내보냈다. 일찍이 없었던 권력의 소리 장악이다. 자연히 밑에서 치받치는 소리도 만만찮다. "전라도서 대통령 나왔다고 진짜배기로 기대 많이 했지라! 그런데 요즘은 그 양반, 안 되느니만 못한 것 같다들 말한당께요." 한 주간지가 들려주는 광주사람들의 현지 소리이다. 마침내 광주 시민단체들까지 현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성토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누가 광주사람들을 지역감정에 매몰되어 있다고 했는가. 이처럼 상황에 따라 진정한 자기 소리를 독창적으로 내는 것이야말로 시이자 민요이다. 민중의 소리판에는 음치도 말더듬이도 없다. 우리 시대에 민요를 다시 주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