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지푸라기 길들이기

적하리(赤下里). 마을이 터무니없이 붉다. 석양 탓으로만 여기기엔 온통 붉게 잠겨드는 마을의 짙은 기운이 어째 예사롭지가 않다. '적하'란 이름이 어울린다. 그 마을 사람들은 짚단만 보면 가만 놔두는 법이 없는 할아버지 덕분에 모두 자신의 논에서 나오는 짚단을 소중히 다루고 있다.

할아버지가 지푸라기를 사랑한 시간은 무척이나 길었다. 추수가 끝난 들판을 엄숙한 마음으로 돌며 버려진 짚단을 이리저리 살피는 마음. 쌀알을 남김없이 털어내고도 아직 고운 윤기 머금은 것들을 하나하나 선별한 다음,지푸라기 길들이는 일을 무섭도록 맹렬하게 시작한다.

거칠고 푸석푸석한 지푸라기가 할아버지의 손에 의해 길들여지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투명하고 탱탱한 빛을 띤다. 크고 작은 물건 중 특히 걸음마하는 아기발에나 맞을 법한 짚신을 섬세하게 만들어내는 요술같은 솜씨. 뻣뻣한 짚을 물에 자작여 숨을 약간 죽인 다음 거친 보풀을 훑어내고 곱게 꼬아 얽어낸다. 그토록 곱게 짚을 살려내는 법을 배우고자 몰려들기도 했지만 한 사람도 배우지 못하고 몇 개씩 얻어가는 정도로 그쳤다.

황량한 들판을 뒹굴던 지푸라기는 길들이는 사람에 의해 다시 태어난다. 지푸라기를 길들이려면 그것과 함께 호흡하고 토닥이며 품어주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나눠주리라 작정해야 한다. 숨쉬는 손바닥의 조심스러운 어루만짐. 그러면 살갗을 통해 피를 옮겨받기라도 한 듯 지푸라기들은 살아 꿈틀거린다. 손바닥으로 살짝 비틀고 비비다가 다시 한 쪽 무릎을 굽힌 채 정강이 살갗에 대고 비벼야만 고운 결이 만들어지니, 할아버지는 짚신을 만드는 그 자세 그대로 허리가 잔뜩 비틀어져 하루를,아니 팔십 년을 보내온 것이다. 다리가 휘어진 모양새도 정강이에 짚을 비비기 좋은 자세로 굳어버린게,풀썩 앉기만 하면 금방이라도 뭔가 요술을 부려댈 것만 같다.그렇게 해서 수많은 고인들의 발에 신겨진 짚신들. 할아버지는 자신의 저승길을 위한 짚신도 예비해 놓았을까.

수필가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