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사립대 3학년 정모(25)씨는 지난해 2학기 휴학한 뒤 서울에 자취방을 구했다. 경영학과 편입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서강대 등 서울 주요 사립대의 경쟁률이 40대1을 넘자 '편입 재수'를 해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에 빠졌다. 그래도 지방대 출신들의 취업난을 생각하면 편입 학원에 다니며 1년을 더 소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서울에 눌러 있다.
올해 수도권 대학의 편입학은 그야말로 '바늘구멍'이다. 편입 정원은 동결 또는 감소인 데 비해 지방대생들의 편입 열기는 갈수록 뜨겁기 때문이다. 99학년도 수도권 대학의 일반 편입 가운데 지방대 출신은 무려 62.5%였다. 수도권 대학은 정원을 늘리는 데는 제한을 받지만 결원 충원에는 지방대라는 '마르지 않는 샘'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지방대들은 늘어나는 결원으로 죽을 지경이다. 등록금 의존률이 평균 69%에 이를 정도로 학생들에게 의존하는 사립대로서는 매년 늘어나는 휴학·자퇴생으로 인해 존립의 위기마저 느끼고 있다.
지방대 역시 편입생을 모집해 결원을 메꾸고는 있다. 지난달 말 편입생을 마감한 결과 영남대 5.26대1, 계명대 8.3대1, 대구가톨릭대 6.17대1 등으로 비교적 높은 경쟁률 을 기록했다. 그러나 '윗돌 빼 아랫돌 괴기'다. 이들 대학은 수도권으로 빠져나간 학생들의 빈 자리를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지방대나 전문대에서 충원하는 것이다.
지방대 기피와 충원 도미노 현상은 대학 입학부터 시작이다. 복수지원으로 인한 수험생들의 연쇄적 이동으로 지방대의 정원 미달은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2000년도 전국 대학의 미충원 가운데 비수도권에서 발생한 미충원이 전체의 87.7%(1만6천253명 중 1만4천258명)를 차지하고 있고 이는 해가 갈수록 증가할 전망이다.
고졸자보다 대입 정원이 더 많아지는 2003년부터는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로 몰린다. 신입생이 너무 적어 문을 닫아야 하는 지방대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역에서도 몇몇 대학은 조만간 폐교가 불가피하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이같은 지방대의 위기는 총체적인 수도권 집중에서 비롯됐다. 수도권이 제공하는 풍부한 직업 기회, 연구 및 행정 서비스, 정보 접근 기회는 물론 금융과 행정, 정치와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수도권이 비대해짐에 따라 교육의 수도권 집중도 자연스레 따라가고 있다.
정부의 교육정책도 지방대를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수도권 인구집중 방지라는 명분 아래 수도권 대학의 학생 증원을 억제한 반면 지방대 중심의 증과·증원과 대학 신설을 유도한 것이 수도권 대학의 인기만 높인 꼴이 된 것이다.
지방대 육성 정책 역시 '빛 좋은 개살구'로 일관됐다는게 한결같은 지적이다. 특히 지난해부터 시행한 두뇌한국(BK21) 사업 중 대학원 육성사업은 지방대학의 대학원 교육과 연구 기능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대학원 육성사업의 경우, 수도권 소재 대학과 포항공대, 과학기술원이 집중적으로 혜택을 받았으나 지방대들은 대부분 그 혜택에서 소외됐다. 사업 선정 결과를 보면, 과학기술분야의 26개 과제 중 포항공대와 과학기술원을 제외한 일반 지방대학이 주관대학이 돼 선정된 과제는 1개 과제(경상대학교)밖에 없다. 인문사회분야 18개 과제 중 지방대학을 주관으로 선정된 과제는 2개 과제(대구대학교와 충남대학교)에 지나지 않는다.
일부에서 제기하는 수도권 대학과 지방대간의 '기능분담론'은 삐뚤어진 발상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 BK21사업 수행과 맞물려 지방대는 '학사과정교육 중심대학'으로 육성하고 수도권의 대학은 '대학원중심대학' 또는 '연구중심대학'으로 육성하자는 내용이다. 이는 단순히 대학간 기능 조정의 차원을 넘어 대학간 서열 체제를 고착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 연말 '지방대 육성대책'을 내놓았다. 지방대의 자생역량 강화, 권역별 산·학·연 연계체제 구축, 지역 평생학습기관으로 육성, 지방대 출신의 취업기회 확대, 우수학생·교수 유치 여건 조성, 양적 감축과 질적 발전 추구 등이 주요 골자다. 하지만 여기에 관심을 갖는 지방대는 별로 없다.
강덕식 경북대 교수회장은 "공청회 한두번으로 만들어지고 정작 투자는 뒤따르지 않는 대책에 무슨 기대를 가질 수 있겠느냐"면서 "교육의 균형적 발전과 선진국 수준으로의 도약을 위해서는 기본적인 정책 틀에서부터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지역 교수들은 "최소한의 연구에도 지원이 안 돼 좌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아우성이다. 그런데도 교육부는 예산 지원으로 대학들을 길들이고 숨통을 조이는 관행을 버리지 않고 있다.
경북대는 지난해 교육부가 실시한 대학개혁 평가에서 최고점을 받아 수십억원의 뭉칫돈을 지원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교수회 학칙기구화 등으로 교육부와 갈등을 빚어 '개혁의지 부족'이라는 미운털이 박혀 아예 지원대상에서 제외됐다. 그 돈은 다른 대학으로 흘러갔고 박찬석 총장이 지난달 중순 급거 상경, 교육부 장관에게 격렬하게 항의하기도 했지만 허사로 돌아갔다. 중앙정부의 돈에 울고 돈에 웃는 지방대 교육재정의 현주소다.
학생 등록금이나 교육부 지원 외에 외부 기부금 등을 통한 사립대의 교육·연구 여건 개선도 수도권과 지방에는 큰 차이가 난다. 지방대학의 경우 수도권 대학에 비해 일반기부금, 연구기부금 등이 3분의 1에 불과하다. 모금도 동창회 등이 고작이고 대기업 참여는 갈수록 찾아보기 힘들다.
지방대의 생존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원활한 재정 운용과 교육 여건 개선이 필수적이다. 정부가 진정 지방대 육성을 생각한다면 지방대에 대한 자원 투입을 늘리고 수도권과 효율적으로 배분될 수 있도록 제도적 틀을 마련한 가운데 내부 혁신을 유도해야 한다.
지방대의 위기는 교육정책으로만 극복할 수 없다. 사회 전 분야의 수도권 집중을 완화하는 정책이 수반되지 않는 한 근원적 치료는 불가능하다. 행정기관과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분산하고, 세제·행정 지원을 통해 기업체의 본사를 지방으로 옮기도록 유도하는 등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포항공대의 성공적 모델 외에도 경북대의 해외인턴십 제도나 샌드위치 교육, 영남대의 공장형 실습장과 반도체 청정실 등은 대학 스스로 경쟁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성공한 좋은 사례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지방분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부분적 결실로 그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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