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글래디에이터

지난 여름, 우리 가족은 영화 '글래디에이터(검투사)'를 보러갔다. 설익은 오후는 많은 관객을 부르지는 않았으나 영화는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스크린 속을 헤매던 나의 의식이 한순간 현실로 되돌아온 것은 영화가 물씬 무르익을 때였다. 담배 연기. 몇 줄 앞선 자리에서 누군가 불량한 자세로 만용을 부리고 있었다. 늘어진 회색 연기가 사악한 뱀처럼 피어올라갈 때마다 모두들 힐끗힐끗 그 출처를 파악하고서도 하나같이 못본척 하는 광경은 여름밤 모기 한 마리에 잠을 설치는 촌극 그대로였다. '극장안에서는 금연'이라고 배웠을 초등학생 태환이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누군가가…'하며 기대했던 나는 결국 그 누군가가 될 수 밖에 없었고 촌극은 끝이 났다.

도대체 무엇이 '글래디에이터'의 용기있는 태도에 감동했을 수십명의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들었을까? 무관심? 아니면 손익을 판단한 약삭빠른 상상력 때문일까? 잘못을 지적하는데 무슨 육체적 힘이 필요한가? 그릇된 것임을 알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면 옳고 그름의 구별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약자에 강하고 강자에 약한 전형적인 동물의 습성을 우리에게서 볼 때마다 서글픔마저 느낀다.

사소한 일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이런 태도가 36년간의 일본 식민을 허락하게 한 보이지 않은 힘(?)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인간의 힘은 정신의 힘이다. 목숨을 건 용기만이 진정한 용기일까? 그다지 큰 모험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평범한 상식과 같은 용기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생명수이다.

교육은 학교만이 아닌 삶 자체에서 행해지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그 실천자들이다. 왜냐하면 교육은 실천에서 일어나며 실천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없는 형식, 형식없는 내용은 국민없는 나라, 국가없는 민족과 같다. 실천을 외면한 우리 성인들로부터 자라나는 새싹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글래디에이터'를 통해 대리만족하며 돌아서는 비대한 덩치들의 움츠려든 뒷모습을 우리의 미래들에게 더이상 보여주지 않는, 살아있는 사회를 위해 한 번 더 숙고할 시간을 가져보자.

대구교육대 교수.미술교육학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