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조 군주 2대가 보여주는 '정치'

근세 중국을 대표하는 황제를 꼽으라면 누구나 청조의 강희제(康熙帝.재위 1661~1722년)를 거론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옹정제(雍正帝.재위 1723~35년)는 아버지와는 다른 통치스타일로 중국을 다스려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했던 독재 군주로 평가받았다. 이들 부자는 비록 황제로서의 면모는 달랐어도 정치는 무엇이며, 모름지기 정치 지도자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서양 최고의 중국사가 조너선 스펜스(예일대 석좌교수)와 일본의 동양사학계의 거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각기 다른 서술 방식으로 쓴 청조 황제 '강희제'와 '옹정제'의 전기가 나란히 번역, 소개됐다. 강희제 자신이 이야기하는 자서전 형식으로 위대한 군주 강희제의 자화상을 풀어낸 '강희제'(이준갑 옮김.이산 펴냄)와 전형적인 전기형식으로 독재 군주 옹정제의 초상화를 재현한 '옹정제'(차혜원 옮김.이산 펴냄).

성조 강희제는 무려 61년간 중국을 다스린 황제. 역대 어떤 중국의 황제보다 긴 재위기간을 기록한 그는 청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다진 인물이다. 서역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타이완을 중국에 복속시켰다. 또 백성들의 세금을 크게 경감시켰고, 문화사업을 지원해 역사서와 백과사전을 편찬했다.

그는 다스림(治)이란 중국 전체의 경제적.교육적 구조에 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것으로 인식했다. 이런 통치관은 "훌륭한 정치란 백성들로 하여금 편히 쉬게 하는 것이다. 정치를 잘 한다는 것은 백성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수많은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은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만 못하다"는 그의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였다. 유교경전을 열심히 읽었고, 뛰어난 주자학자들을 높게 평가했지만 결코 도덕적 고결함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이 대단히 많아 수학이나 천문학, 자연과학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자식들(아들 36명, 딸 20명) 때문에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 황자들 사이에 파벌싸움이 그치지 않았고, 황태자를 두 번씩이나 폐위시키는 한편 파당을 도모한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역사 속의 인물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자서전 형식으로 완성된 강희제의 전기는 마치 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문장이나 대화는 하나같이 사료에 근거해 황제 강희제와 인간 강희제의 모습을 되살려 놓았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로 권좌를 물려받은 세종 옹정제는 13년간 중국을 통치하면서 어느 황제보다 많은 일을 했으며, 청조의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에 대한 평가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정략가'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저자 미야자키는 옹정제의 높은 정치력은 청조 최대의 번영시기인 건륭시대를 여는데 크게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아버지 강희제처럼 화려한 전공은 세우지 않았지만 내치에 있어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독재 군주였다고 단언한다.

옹정제에게 가장 시급한 개혁과제는 정치였다. 정치 보스를 중심으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조직이 조정에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한 그는 붕당을 깨뜨리고, 새로운 인재들을 발탁했다. 재위 13년동안 한번도 북경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을 정도로 국사에 전념한 그는 초인적인 의지와 정력으로 모든 것을 관장한 옹정제식의 정치를 펼쳐 나갔다.

이런 옹정제식 통치에 대해 저자 미야자키는 한마디로 선의에 넘치는 '악의의 정치'였다고 말한다. 이런 선의의 독재가 낳은 역효과 다시 말해 선의의 독재를 경험한 대중은 독재에 길들여진다는 사실에 저자는 주목하고 있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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