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여문통(55)씨. 영화 배우 신현준을 닮아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이다. 여느 사람들처럼 이 땅에서 태어나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보냈고, 아내와 두 자녀를 뒀다. 충북 옥천엔 양친의 산소가 있고, 형은 식당을 한다. 영락없는 한국의 중산층.
하지만 그는 이 땅의 '영원한 이방인'이다. 화교. 전국 1만8천여명, 대구·경북 1천500여명 화교 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의 무역상이었다.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중국산 능라주단·한약재·도자기·술·담배 같은 것들을 팔았으리라.
대구·경북 1500여명 남아
그러던 아버지가 한국에 눌러 살기로 마음먹은 것은 1947년. 국공 내전에서 공산당이 우세를 점하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가족들은 도망치다시피 고향을 떠나 한국으로 왔다. 여씨는 그 해에 태어났다. 한국 화교들은 거의 여씨네 비슷한 이주 내력을 갖고 있다.
여씨는 한국말을 완벽하게 구사한다. 배운 게 아니라 출생과 동시에 습득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 골목에서 어울리던 한국인 꼬마 친구들이나 말솜씨에서야 다를 바가 없다. 유일한 문제는 글 쓸 때의 맞춤법. 자신이 없어 한글로 글 쓰기는 꺼린다. 화교 학교에서 한글 쓸 기회가 거의 없었던 탓이다.
한국에서 초중고 과정을 화교학교로 마친 뒤 대만으로 날아 갔다. 대만사범대학. 하지만 2학년을 마치고는 중퇴했다. 되돌아 왔으나 할 일이 없었다. 직장을 못구해 중국 요릿집에서 9년 동안 일했다. 그러다 다시 경산대 한의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졸업장도 별 의미없어
그처럼 한의사를 하는 사람도 몇 있지만, 여씨의 화교학교 동창생들 대부분은 중국 요릿집을 한다. 취직을 할 수도, 무역을 할 수도, 거창한 사업을 벌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도 임시 거류 외국인. 애써 받아 봤자 대학 졸업장은 종잇조각 되기 일쑤라고 했다. 그래서 여씨는 아들·딸을 모두 치대·의대에 보냈다. 자영업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조치를 취한 셈.
화교는 그래서 '이방인'이라고 했다. 세금 낼 의무만 질 뿐, IMF가 닥치기까지는 집조차 마음대로 살 수 없었다. 한국에는 영주권 제도도 없다. 거류 기한이 3년에서 5년으로 늘어난 것이나마 불과 3년 전. 사소한 서류도 동촌 기차역 근처 출입국 관리사무소까지 가야 뗄 수 있다. 여씨는 한국 화교들이 세계 유일하게 성공하지 못한 중국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1970년대까지 7만명에 달하던 화교가 거의 떠나고 지금은 1만8천여명만 남았을 뿐이라고 했다. "이제 갈 사람은 다 갔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모두 몇 세대를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생활 터전이 여기고 아버지 산소가 여기에 있지요". 그러면서 여씨는 대구를 고향이라고 했다. "여기서 나고 자랐으니 여기가 고향이지요. 불편하고 서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라도 결국 제 고향은 한국입니다".척박한 사막…애환속 부대껴
그만 그런 것도 아니라고 했다. 미국이나 대만으로 떠난 그의 동창생들도 걸핏하면 한국을 찾는다고 했다. 한국 땅에서는 절대로 살지 않겠노라 단호하게 떠났지만, 대만도 중국도 역시 고향은 아니더라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잠시 입국했다가 떠나는 외국인처럼 대하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당신은 이방인, 싫으면 떠나라! 우리가 고함치고 돌아선 것은 아닐까? 짧게는 3세대, 길게는 5세대에 걸쳐 이곳 '고향'에서 살고 있는 화교들에게 이 땅은 영원히 뿌리내리기 힘든 척박한 사막이고 말 것인가?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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