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홍경호 세상읽기-일의 성패

사람들의 순수성이 탁해지고 마음이 삐뚤어지니 무엇이나 삐딱하게 보는 풍조가 만연한다. 잘난 사람들한테 속고 또 속다가 손해만 본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근래에 와서 '삼국지'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오는데, 이런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별난 해석들이 다 나온다.

제갈공명은 대단한 인물이 아니다, 유비는 관후한 장자가 아니라 실은 후덕한 척하는 위선자였다 등등의 해석이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제갈량은 여섯 번이나 기산으로 나아갔으나 허다한 장병들만 잃고 얻은 것은 고작 몇 개 군현에 불과하다. 장판교 전투에서 조자룡이 악전고투 끝에 자신의 어린 아들, 아두를 구해오자 유비가 아들을 살려내어 고맙다는 말 대신에 아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이 어린 놈 때문에 훌륭한 장수를 잃을 뻔했다"고 말한 대목이나 유비가 임종의 자리에서 한 손으로는 눈물을 닦고 한 손으로는 제갈공명의 손을 잡으면서 '내 자식들이 도와줄 만한 인물이면 도와주고, 재주가 모자라거든 공께서 성도의 주인이 되도록 하오'라고 후사를 부탁한 대목은 그의 본심이 아니라 일부러 꾸민 연기(演技)이다. 이런 연기를 통해서 유비는 조자룡의 마음을 확실히 샀고, 죽음의 자리에서 눈물을 흘려서 제갈공명을 견제했다'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에 접하면서 어쩐지 씁쓰레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정다감한 시절 밤새워 '삼국지'를 읽으면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었던 충신열사들과 충의지사(忠義志士)들을 위해 눈물 흘리던 우리의 정서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인 까닭이다. 아아, 하늘의 별처럼 빛나던 저들의 의기여!

'삼국지'는 읽어도 탈이요, 안 읽으면 더욱 탈이다.

이것을 잘못 읽으면 권모술수와 권도(權道)에만 능한 우리 어른들 꼴이 되기 쉽고, 안 읽으면 나라나 회사의 경영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조차 지킬 수 없는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우리의 이러한 씁쓰레한 감정을 잘도 받아들인다.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대권을 놓고 벌이던 음모, 간계, 살생, 배신, 배신자, 음흉한 흉물, 작당, 속임수 이런 것들에 길들여진 세대인지라 무엇이나 거꾸로 보는 것에 익숙해진 탓이렸다.

그 결과로 우리는 앞으로 몇 십 년 혹은 몇 백년이 흘러도 고칠 수 없는 고질적인 병을 얻었다. 일의 성패만을 따져서 사람을 평가하는 병이 그것이고, 이용가치만 있다 싶으면 전력이나 인간성 같은 것은 따지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람을 쓰는 병이 그것이다.

오늘의 한탕주의도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우리 철새 정치가들의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는 버릇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렇게 되니 은근히 풍운이 일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간웅, 정권을 빼앗고 훔치고 도적질하는 찬탈자, 어떻게 하든 부만 축적하면 된다는 간상배(奸商輩)들이 횡행한다. 과정은 어떠했든 결과만 중요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겨난 병폐이다.

사람을 쓸 때 덕과 재능을 겸비해야 한다는 제갈량의 용인술(用人術)을 원칙으로 하면 인재가 모자라는 것이 탈이고, 덕에는 상관없이 재능만 있으면 누구든 불러서 쓰던 조조의 그것을 원칙으로 하면 간사한 자들이 들락거리고 반역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떤 것을 원칙으로 하든 분명한 것은 핵심인물은 반드시 덕을 갖춘 자와 애국심이 돈독한 자여야 한다는 사실이다. 인재는 인재를 부르고, 바보는 바보를 부르고, 간교한 자는 간교한 자를 부르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도 사람을 잘 써야할 시점이다.

차기를 노리고 집권자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턱없는 자들이 날뛰도록 사람을 쓰면 결국 그 해악(害惡)을 뒤집어 쓸 쪽은 우리 백성이다.

한양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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