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카테린부르크
두 겹의 차창 밖으로 전개되는 겨울 시베리아의 풍경은 대단히 단순하다.자작나무들,오각형 지붕을 이고 파랑 노랑의 창틀을 단 철로변의 소박한 집들,막연한 설원이 전부다.물상들은,눈으로 뒤덮인 까닭에,제 색깔과 모양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있다.해가 이울면,집들의 창이 노란 불빛으로 가득차고,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여인은 식구들의 저녁밥을 챙기고 있는가?
그러나 거듭 반복되는 풍경.간간이 지루함이 찾아온다.그럴 때는 침대에 누워 책을 읽거나,잠을 잔다.보드카나 병맥주를 마시며 잡담을 나누기도 한다.
운이 나쁘면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사진을 찍으려고 간이역에 잠깐 내렸던 사진기자는 얼굴이 벌개져서 돌아온다.불량기가 도는 러시아 청년 3명이 자기를 희롱했다고 한다.그들은 어느새 취재팀의 객실로 밀고 들어와 지분거린다.권투와 레슬링 그레코로만형의 자세를 선보이며 무력 자랑을 하는데,심히 마뜩찮고 성가시다.안내인은 그 와중에 모자를 빼앗겼다.
열차는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우랄산맥을 넘으며 1천814㎞의 거리를 27시간동안 주파한 뒤 예카테린부르크에 닿는다.유럽에서 보았을 때 아시아의 관문에 해당하는 도시 예카테린부르크(전 스베르들롭스크).1734년에 형성됐으니 나이는 267세이다.사회주의 혁명 직후 차르(제정 러시아 시대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유배됐다 처형당한 곳으로 유명하고,옐친 전 대통령의 모교인 우랄공대로 인해 새삼 주목을 받은 도시이기도 하다.지하자원으로는 다이아몬드와 금같은 광물이 풍부하다.
시간은 새벽 1시50분.모스크바 시간으로는 밤 11시50분,한국시간으로는 새벽 5시50분이다.이른 새벽의 예카테린부르크역 일대는 춥고 을씨년스럽다.외관과 달리 내부 시설이 형편 없는 역전의 한 호텔 침대 위를 찾아들어가 구겨져 잠든다. 다음날,연락을 받고 예카테린부르크 철도국 부국장으로서 보안 및 운영을 담당하는 세레브레즈니코프 알렉산드르 니콜라이예비치씨와 여객계장 알렉 바실리비치 스첼마첸코씨가 호텔로 찾아왔다. 휴일이었는데도,두 사람은 성의를 다했다. 부국장에 따르면 예카테린부르크 철도국은 주정부 산하 기관으로서 러시아 철도부(MPS)의 통제를 받아 우랄지역의 화물과 승객을 운송하는 일을 맡고 있다.통관문제는 우랄 세관에서 처리하는데 철도국과 세관의 관계는 매우 양호하다고 한다.
화물의 경우 수출입 화물은 거의 없고,자체 화물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 이후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이용하는 외국 화물이 급감해 버린 사실을 입증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화물은 주로 의료기기, 공장용기계, 산업관련기계 등이며,오픈 컨테이너를 통해 들어오고 있다.그는 한국측 화물에 대해서는 "삼성과 LG의 가전제품이 많이 들어오는데 자세한 내역은 모른다"고 말했다.그는 그러면서 남북한종단철도(TKR)와 TSR이 연결돼 교역이 증가하고 여행객이 다수 왕래하게 되기를 강하게 희망했다.
마침 여행객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열차 안에서 겪었던 불쾌한 경험에 대해서 말했더니,여객계장은 "여객 열차에는 경찰이 동승해 있다"면서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러고 보니 제복 입은 사람들이 분주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왔다갔다한 적이 있었다. 여객계장에 따르면,열차의 각 량에 동승한 차장들이 분위기를 점검하고,문제가 발생하면 경찰에 통보한다.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열차장이 무선전신으로 다음 정거역에 내용을 전달한다. 정거역에는 해당 지역 경찰들이 나와 있다가 문제아를 즉각 연행해 간다.그렇다면 우리는 실정을 몰랐던 탓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부국장은 이 대목에서 "단체여행객의 경우 안전문제를 별도로 챙긴다.개인적으로 겪는 불편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한국이나 유럽의 열차들도 사정은 비슷하지 않은가"라고 반문했다.아닌게 아니라 서유럽의 국제열차도 불안요소를 안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집시들이 노골적으로 설쳐대는 서유럽의 열차에 비한다면 차라리 훨씬 안전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주정부는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해 예카테린부르크역사를 개.보수하고 있다.3년 전부터 역사의 벽과 기둥,창문구조만 유지,보존하고 나머지는 현대와 고전을 가미하는 방식으로 모두 바꾸고 있다.올해 안에 이 작업은 마무리 될 것이다.
이미 작업 완료된 열차승객용 대합실은 화려하기 그지없다.우랄의 대리석과 광석이 내부를 장식하고 있고,천장에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다.대합실의 의자는 모던하고 편안하다.짐 보호소는 물론 샤워시설까지도 구비돼 있다.열차승객외에는 대합실에 머물 수가 없도록 한 시스템도 특이하다.
여객계장은 전광판을 가리키면서 "곧 영어도 병기할 것"이라고 말했다.여행객이 러시아에서 느끼는 가장 커다란 불편은 영어가 전혀 안통한다는 것인데,적어도 예카테린부르크역에서 표를 끊을 때 만큼은 별반 불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될 듯하다.시베리아 횡단철도는 꾸준히 개선되고 있는 중이다.
글:이광우기자
사진:강원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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