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낭만파 클럽

모든 것이 어째 점점 더 빠르게 돌아가는 것 같다. 빌 게이츠가 그의 저서 '생각의 속도'에서 갈파한, 속도가 지배하는 2000년대 사회이기 때문일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요즘 우리 사회의 속도는 정도가 좀 지나친 것 같다.

아이들의 학습형태만 해도 그러하다.

우리말 발음도 서툰 서너살짜리 꼬마들이 영어학원부터 다니고, 초등 6년생이 되면 중1 과정을, 중3생들은 고1과정을 앞당겨서 공부한다. 제 학년에 맞는 과정을 공부하는 학생은 좋은 대학 들어가려는 희망을 포기해야한다나. 일상의 모든 것에서 강조된다.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벼논에 심은 모는 시간이 갈 만큼 가야 활착하고 생장을 한다.

성질 급한 농부가 어서 빨리 자라 수확하기를 기대하며 심은 지 며칠 안되는 벼포기를 쏙쏙 뽑아 올려놓는다면 얼핏 볼땐 키가 자란 것 같지만 뿌리가 뽑혀진 탓에 결국 얼마 못가 죽게 된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고 선현들은 말했다.

##인간미 잃어버린 현대사회

빠르게 돌아가는 것들에 정신의 고삐를 매어두다 보니 때로는 우리가 어디 와있는지 모를 만큼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하고 그런 와중에서 잃어버린 것들도 적지않다. 그 중 하나가 '낭만'이라는 이름의 정신적 넉넉함이 아닐까 싶다.

지난 60, 70년대까지만 해도 비록 생활은 힘겹지만 정신적으로는 낭만을 즐기며 살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구 동성로의 생맥주집 '혹톨' '가보세'등에선 가벼운 주머니를 털어 하루의 시름을 지우려는 문화예술인.언론인들로 떠들썩했고, 지금은 사라진 '하이마트'니 '휘모리'같은 클래식 음악감상실들엔 음악을 사랑하는 직장인, 대학생들이 곰팡이 냄새에도 아랑곳없이 한껏 마음의 사치를 즐기곤 했다.

##'속도전'에 경쟁만 치열

그러던 것이 정보화 사회, 지식기반 사회라는 낯선 조류가 거센 해일로 밀려들면서 어느 순간 치열한 경쟁사회로 돌변해버렸다. '너가 죽어야 내가 사는' 서바이블 게임같은 사회, 단두대로 변해버린 구조조정, 청소년을 자살로 모는 대학입시….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 '낭만'은 표표히 우리 곁을 떠나버렸고, 이 사회는 갈수록 사막화돼가고 있다. 인터넷의 대중화에 따른 최근 일련의 사회악들은 인간의 비겁함과 사악함, 갈데까지 간 인간성 마멸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그런 가운데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렸고 내팽개쳤던 '낭만'이라는 단어가 요즘 다시 세인들의 입에 조금씩 오르내리고 있다. 어제 서울에선 각박한 세상살이 속에서도 마음의 멋을 가꾸자는 일단의 사람들이 '낭만파 클럽'이라는 향수어린 이름의 모임 하나를 탄생시켰다. 주로 문화.예술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애호가들이 주축을 이룬 일종의 정신문화운동 단체이다. 그 얼마전 이 모임에 관한 신문의 예고기사를 접했을때 뭐랄까, 팍팍해져 먼지 풀썩거리는 땅에 시원한 빗줄기가 뿌리는 듯한 청량감을 느꼈다.

##정신적 넉넉함, 여유 가져야

'인간미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보자'고 10년전부터 이런 모임을 구상해왔다는 정홍택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은 "잘난 사람들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조금은 바보스럽게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소개했다. 3비(3非: 비정치.비이념.비편파적), 5불문(남녀.국적.직업.학력.종교불문)의 원칙도 신선하지만 '차라리 내가 손해보더라도 따지지 말자' 등 이 모임이 내건 20개의 슬로건이 가슴에 와닿는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이기주의와 지나친 경쟁심, 작은 일에도 걸핏 목숨거는 천박한 '나'의식이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모처럼 접하는 너그러움과 여유이다.

이 모임은 앞으로 10~20명 단위의 '개미클럽'을 만들어갈 계획이라고 한다.

장기적으로는 전세계로 확산시켜 지구차원의 정신운동으로 만든다는 청사진도 갖고 있다한다.

따스한 봄날, 풍선처럼 잔뜩 부풀어오른 민들레 홀씨가 미풍을 타고 퍼져나가듯 문화.예술 사랑, 그리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열정으로 가득해진 마음들이 이 땅 구석구석을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것은 비단 문화.예술 사랑운동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회복을 위한 운동이기도 하다. 공원 벤치에 홀로 앉아 시집 읽는 사람을 아름답게 보아주는 그런 분위기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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