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김씨 담암공파 19대 종손 두순(69)씨. 봉화군 봉화읍 거촌1리의 종택을 지키는 그의 하루는 매우 분주하다. 1천평이나 되는 집터 위의 50칸 고택, 그걸 손보는 일만도 해도해도 끝이 없다. 지은지 500년이나 된 안채·사랑채·정자채는 세월의 무게에 눌려 안쓰럽게 휘청거린다. 손 보겠노라 마음 먹고 달려든 건 재작년. 42년 간 몸담았던 교직에서 퇴임한 뒤였다.
온돌방을 후끈 달굴 장작. 아침엔 그것이 간밤 내린 눈에 젖지나 않았는지 살폈다. 받침대를 세워놓기는 했지만, 기운 잃은 노송에도 잠시나마 마음 놓을 수 없다. 지난 여름에는 내내 마당 잔디를 새로 깔았다. 서까래엔 개미가 덤비지나 않았는지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 오래오래 보존하겠다는 마음에 집에 니스를 칠했다가 문화재관리국 항의 때문에 일일이 벗겨낸 적도 있었다.
종손. 김씨는 서울에서 학교 다닌 시절 빼고는 이 종택을 떠나 본 적이 없다. 젊은 시절, 아무리 종손이라 한들 어찌 꿈과 열정이 없었으랴. 하지만 부와 명예를 좇아 서두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욕심 내지 마라. 부귀영화를 꿈꾸지 마라. 선조께서 네게 맡기신 이 집과 가문을 잘 지켜서 다음 대에 넘겨 주는 게 네 임무이느니라". 할아버지가 남기신 말씀이다. 너는 종손이느니라!
아버지만 집을 지키셨어도 상황은 조금 달랐으리라. 하지만 그는 '종손의 삶'을 거부하고 홀로 서울로 떠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두순씨가 일찌감치 이 오래된 종택의 주인이 됐다.
할아버지는 손자 마저 어디론가 달아날까 걱정했던지, 대학 가는 것 조차 반대했다. 진학이 결정되기 전에 엄중한 서약이 앞서야 했다. 학업을 마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고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켜 돌아왔다.
두순씨는 봉화 인근 중고교에서만 42년간 아이들을 가르쳤다. 매일 출퇴근하기에 다소 먼 학교로 발령 받은 적도 있지만, 오토바이와 기차로 대응했다. 절대로 종택을 떠나서 안된다는 할아버지 말씀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이제 할아버지의 당부를 자신이 해야 할 차례가 닥쳤다. 산골 마을 거촌. 이곳 사람들은 너도나도 아이들을 대도시로 유학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두순씨는 다섯 중 네 아이를 봉화에서 고교 과정까지 마치도록 했다. 종택을 매일 느끼는 것이 어떤 첨단 지식 못잖게 소중하리라는 게 어느듯 자신의 믿음이 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아이는 끝내 대구로 떠났지만, 매주 편지로 가문과 전통을 잊지 않도록 가르쳤다.
"가문과 예의 범절을 지키는 것은 케케묵은 집착도, 세월을 거스르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바로 세우는 토대입니다". '무항산 무항심'(無恒産無恒心). 중요 민속자료 170호로 지정된 정자 쌍벽당과 종택을 두고 그가 한 말이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전통이 없으면 정신도 오래잖아 소멸하고 말리라는 뜻이라고 했다. 두순씨가 500년 종택 보존에 그토록 몰두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두순씨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 "참을 줄 알아야 하고, 싫어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삶의 원리를 우리가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두순씨는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 커 조상 뵐 면목이 없다고 했다. 더하거나 빼지 않고 물려받은 그대로 물려주는 것이 그의 임무이나, 지난 여름 고서 300권을 도둑 맞고 말았다고 했다. 선대 어른들이 임진왜란, 6·25의 전란에도 지켜냈던 집안 보물을 한낱 도둑 조차 못막아내 잃어 버리다니… 며칠 집을 비운 사이 발생한 일이어서 더 죄스럽다고 했다. 기어코 되돌려 놓겠노라 여기저기 광고를 내기도 했지만 아직 감감 무소식이어서 속이 탄다.
아파트, 핵가족, 젊은 부부간의 거리낌 없는 반말 대거리… 많이 달라진 세태. 가끔씩 두순씨는 벼락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금세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종손이되 그냥 종손이 아니라 21세기의 종손이기 때문.
그러나 두순씨도 차츰 나이 들수록 깊어지는 걱정을 안고 있었다. 그래도 내 대까지는 그럭저럭 이 집을 지켜 왔지만, 앞으로는 어찌될지… 청주에 나가 사는 큰아들이 틀림없이 돌아 와 주리라 믿고 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으리란 것 역시 알고 있다. 현대문명과 맺은 그 많은 인연들을 애들이 잘 끊어낼 수 있을지, 도시생활이 몸에 밴 며느리는 또 어떻게 생각할지, 손자들 교육은? 걱정이 태산이다.
저 멀리 시원하게 뚫린 중앙고속도 덕분에 봉화도 이제 도시문명에 더 가까와진 듯 보였다. 그러나 전통의 가치가 그만큼 더 멀찍이 물러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종손의 근심이 어찌 두순씨만의 것일까. 영주·봉화·안동 일대의 여러 종손들과 유림 뿐 아니라, 전국의 나이 든 종손들의 한결 같은 걱정이라고 두순씨는 말했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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