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임재해교수가 새로본 신명과 해방의 노래 '우리민요'

요즘 언론문건으로 정치권이 새삼 떠들썩하다. '새삼'이라고 한 것은 쟁점이 된 언론문건 사건이 지금 비로소 문제된 것이 아니라 문일현 기자의 언론장악 관련 문건 이후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같은 언론문건이 해마다 살아나서 정치권의 발목을 잡고 있는 꼴이다. 우리 소리에도 해마다 반복되는 부끄러운 행태를 노래하는 전형이 있다. 각설이타령이 그 보기이다.

얼~시구시구 들어간다/ 절~시구시구 들어간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각설이들은 대문에 들어서면서 각설이타령을 시작한다. 남의 집으로 느닷없이 들어가는 데서 비롯되는 충격을 줄이기 위해 타령을 통해 집 주인에게 자신들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가 죽지도 않고 또 왔다고 하는 것은 강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동시에, 지난해 구걸을 도와준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계속되는 인연과 감사의 뜻이 갈무리되어 있는 셈이다. 이어서 자기 소개로 들어간다.

응허나 요놈이 요래도/ 정승의 판서나 자제로

팔도나 감사는 마다고/ 돈 한 푼에 팔려서

구걸신세 괄시하지말라

"각설이쟁이로 나왔다"고 한다. 지금 비록 문전걸식을 하고 다니지만 과거의 신분은 상당했다는 것을 과장해서 말한다. 과도한 긍지와 자존심이 깔려 있어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장과 풍자의 양식을 인정한다면, 자신들이 비록 구걸을 하고 다니지만 사람의 신분은 누구나 다 고귀하므로 걸인이라 하여 사람 괄시는 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동냥은 안주더라도 쪽박은 깨지 말라는 요구가 은유되어 있는 셈이다.

감사 자리도 마다하고 돈 한 푼에 팔려 나왔다는 것은, 지체나 벼슬보다 돈이 더 낫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봉건적 신분제에서 천민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우리부모 날 길러/ 좋은 영화를 볼라다가

병신이가 되었소/ 병신이 팔자가 기막혀

문전마다 다니면서/ 어른의 덕을 봅니다

앞의 거들먹거림과 달리 이 노래는 팔자가 기박하여 신체 불구자가 되는 바람에 좋은 영화를 보지 못하고 각설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앞의 사설이 과장법에 의한 풍자라면 이 사설은 아주 현실적이다. 이 대목에서 각설이는 의도적으로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한쪽 팔이 없는 몸짓을 하며 시각적 효과를 낸다. 자기 처지를 소개한 다음 타령 재주를 과시한다.

막걸리 동우나 먹었는가/ 걸찌걸찌 잘 헌다

기름 동우나 먹었는지/ 매끌매끌 잘 헌다

시전 서전을 읽었는지/ 유식하게도 잘 허고

논어 맹자를 읽었는지/ 대문대문이 잘 헌다

각설이타령을 흥에 겨워 걸쭉하게 풀어나가는가 하면, 막힘 없이 매끄럽게 이어나가고 유식한 문자도 써가면서 대목대목 잘 하는 상황을, 음식이나 경전의 상징성에 비추어 재미있게 나타냈다. 지금부터 노래하게 될 타령 솜씨를 그럴듯하게 드러냄으로써, 주인의 관심을 끌고 따뜻한 배려를 기대하는 것이다. 한낱 걸인이 아니라 전문적인 타령꾼으로서 역량을 과시하고 자신의 소리와 춤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까닭이다.

따라서 각설이는 단순한 동정이나 자선을 기대하는 예사 거지와 달리 자신의 예능을 파는 일종의 뜨내기 연예인이다. 몇 사람이서 무리를 이루어서 타령 가락을 익히고 바가지나 깡통 장단에 맞추어 해학적인 몸짓까지 터득하여 각설이타령을 한다. 그러므로 각설이패는 솟대쟁이패와 사당패, 풍각쟁이들과 함께 유랑연예인들로 인정받는다.

한 대문만 빠주만/ 지집 자석을 굶기고

섣달대목을 빠주만/ 사대봉제사 굶긴다

마을을 찾아가 구걸을 할 때에는 한 집도 빠뜨릴 수 없다. 계집과 자식들을 굶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문마다 집집마다 차례로 훑어나가면서 각설이타령 품바를 공연하고 그 대가로 금품을 요구한다. 각설이의 직업 정신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숫자 뒤풀이 속엔 역사의식이…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서 타령의 진수를 보여준다. 가장 흔한 것이 "일자나 한잔 들고나 봐"로 시작되는 숫자뒤풀이이다. 이 대목을 받아서 "일선에 갔던 우리낭군/ 고대 나오도록 기다린다"고 하는가 하면, 일자 다음에 "이자나 한자나 들고나 봐"를 받아서 "이승만이 대통령/ 부통령은 아주사"라고 한다.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면 자신은 부통령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곧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다. 이어서 삼, 사, 오로 바뀜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차례로 받는다.

삼천만의 우리 동포/ 해방이 오도록 기다린다

사천 이백 칠십 팔 년/ 팔월 해방이 웬 말이냐

오천 명의 유엔군이/ 한국나라를 도착했네

육이오 사변에 집 태우고/ 천막살이가 웬 말이냐

일제 이후의 민족사를 숫자에 맞추어 노래한 것이다. 흔히 숫자 십은 '장'자로 가늠하여 "장하도다 우리 국군/ 고맙도다 유엔군"으로 받는다. 각설이타령이 한갓 구걸의 노래가 아니라 일종의 구술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숫자뒤풀이 형식으로 적절히 그려냄으로써 민중들의 역사의식을 일깨워 준다. 일월이 송송 야밤중/ 밤중새별이 완연하고

우리형제 이형제/ 한 서당에 글로 일러

천자도 한 권 몬 띠어냈네/ 품하고도 각설아

이처럼 숫자에 맞추어 재미있는 말로 뒤를 풀어가며 생활사를 노래하기도 하고, "구자나 한 장 들고 봐/ 구십에 나는 늙은 중/ 먹장삼을 털쳐 입고/ 목화동냥을 내려간다"와 같이 한 폭의 풍속화를 그리기도 한다.

혼자 가면은 심심질/ 둘이 가면은 수작질

서이 가면은 가래질/ 너이 가면은 노름질

노름 끝에는 싸움질/ 싸움 끝에는 주먹질

주먹 끝에는 발길질/ 발길 끝에는 동댕이질

숫자뒤풀이가 발전하여 사람들의 모임에 따른 행위를 재미있게 묘사한다. 일종의 짓타령이다. 짓은 곧 몸짓으로서 행위를 나타낸다. 바지타령으로 넘어간다. "여름바지는 홑바지/ 가을바지는 졉바지/ 겨울바지는 솜바지/ 건너집에는 개바지/ 들어가면은 막바지/ 진짜바지는 울아부지 바지/ 딸아 바지는 가랑바지/ 머슴아 바지는 통바지" 마치 역순사전을 보듯이 온갖 바지들이 차례로 제시된다. 그러다가 "이 각설이가 이래도/ 대한민국 나올 때는/ 팔도강산을 다 돌고/ 만인간이 춤을 춘다" 하고 끝을 맺는다. 세상의 만인간들을 춤추게 하는 각설이들 스스로 행위예술가를 자처한다.

각설이타령이 거지들의 행위예술이라면 언론문건은 정치인들의 여론 조작술이다. 언론문건이 문제될 때마다 번번이 국정조사를 요구하지만 늘 거기까지 가는 법 없이 흐지부지 넘겨버리는 재주도 기막히다. 여론 조작의 속셈을 드러낸 언론문건도 문제지만 이를 빌미로 엉뚱한 조건을 붙여 국정조사를 요구함으로써 사실상 국정조사도 막고 국회도 공전시키려는 책략은 더욱 문제다. 더군다나 언론문건에는 패가름과 여론조작의 술수만 있을 뿐 각설이타령에서 보이는 인간적 긍지나 역사의식 같은 것은 아예 없다. 결국 언론조작으로 여론동냥도 못하고 정치쪽박만 깨는 꼴이다. 실제로 언론문건에 개입된 이종찬은 그로 인해 스스로 정치쪽박을 깨고 말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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