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 정태일. 일요일 밤 KBS-2TV를 통해 시청자들의 안방을 찾는 '영상기록 병원 24시'의 일곱 PD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다음달 18일 방영될 1시간 짜리 프로그램 '딱지왕 일규의 세가지 소원'을 만드느라 한달째 대구에서 살고 있다. 일규는 매일신문 1월10일자 '이웃'면에 실렸던 가창의 얼굴 기형 소년. 보도 이후 여러 기관·사람들의 주선·협조로 지난 26일 얼굴 교정 수술을 받았다.
대구서 '일규의 소원' 제작
정 PD는 1994년 PD 생활을 시작한 이래 모두 40여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서른 네 살의 키 크고 잘 생긴 노총각이다. 그의 지프엔 언제나 커다란 옷가방과 6㎜ 디지털 무비 디지털 카메라, 전국 지도 몇권이 실려 있다. 가정용 캠코더보다 조금 크고 무거운 6㎜ 카메라를 손수 들고, 연출·촬영·편집까지 혼자서 해낸다. TV 프로그램 제작에 일반적 최소 단위인 카메라맨·카메라보조·AD(조연출) 등 제작팀이 별도로 있는 게 아니다.
"6㎜ 디지털 카메라는 다큐 방송에 혁명을 불러 왔지요. 생사 기로에 선 환자들 앞에서,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전장에서 여럿이 우르르 몰려 다녀서야 뭐가 되겠습니까? 20㎏짜리 베타 카메라에 뜨거운 조명 기구까지 들이대서야 제대로 될 턱이 없죠". 그는 6㎜ 카메라 예찬자였다.
그도 예전엔 베타 카메라와 스텝이 있어야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으리라 막연히 믿었던 평범한 PD였다고 했다. 그러나 '병원 24시-손창호, 죽음보다 더 큰 외로움'을 제작하면서 그 생각을 버렸다. 6㎜ 카메라가 없었다면 행려 병동에서 외롭게 생을 마감한 탤런트 손창호씨의 마지막 모습을 결코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식당밥·여관방이 더 편안
정 PD는 지프, 식당밥, 여관방이 좋다고도 했다. "집에서 먹는 밥보다 식당밥이 더 맛있어요. 집에서 자는 잠보다 여관방 잠이 더 편하고요". 일년 내내 집을 떠나 살아야 하는 다큐 PD에 맞게 타고난 모양. 일단 여관을 정하면 촬영이 계속되는 한달 가까이 숙소를 옮기지 않는다. 주인과 얼굴을 터고 지내야 조금이나마 더 편하고 싸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지프는 다섯 번째 바꾼 중고차였다. 가진 거라고는 튼튼한 몸뚱이와 지프밖에 없다고 단언할 만큼, 차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했다. 국내라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비행기나 기차를 타지 않는다고 했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다니는 일이 질색이기 때문. 직접 지프를 몰고 도로를 달리는 게 즐겁다고. 아마 이것 역시 타고난 자유 끼 때문이리라.
'병원 24시'의 촬영 기간은 보통 3~5주. 그 중 첫 한 주는 취재 대상과 카메라가 친숙해지는데 들어가는 시간이다. 아무리 털털한 사람이라도 카메라 앞에 서면 평상의 모습을 잃는다고 했다. 카메라를 향해 무작정 욕설을 퍼붓는 정신병동의 사람들, 카메라 앞에 서면 밀랍인형처럼 뻣뻣해지고 마는 식당 아줌마…. 그래 가지고는 휴먼 다큐가 될 수 없는 일.
보통 사람은 거개 일주일 정도 카메라와 친해진 후에야 일상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한다고 했다. 그렇게 찍고도 쓸만한 것보다 버려야 할 것이 훨씬 더 많다.
정 PD 자신에게도 취재 대상과 친해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같이 장난치고 식사하고 병실에서 함께 잠도 잔다. 친근감 없이 짧은 시간에 마구 찍어대서는 그럴싸하게 연출된 드라마나 되기 십상. 그래서도 휴먼 다큐 되기는 힘들리라."고통 속에 죽어 가는 얼굴, 사랑하는 이의 주검 앞에서 통곡하는 사람…. 그런 극적인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고 카메라를 들고 발버둥 치는 내 꼴이 역겨울 때도 적잖았습니다" 이 프로그램 초창기, 그는 충격적인 영상으로 시청자를 사로잡겠다는 가당찮은 생각도 가졌었노라 실토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사랑도 예의도 갖추지 못했던, 오직 시청률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시청자들에게 사죄하는 것이다.
지금 그가 드디어 다다른 깨달음은 인간애인듯 보였다. "'병원 24시'는 피냄새 물씬한 병원 풍경을 그리자는 것도, 죽어 가는 환자의 절규를 들어 보자는 것도 아닙니다. 병원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인생을 이야기 하려는 겁니다. 자살 사이트의 위험을 경고했더니 그걸 이용한 자살이 늘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방송 나간 뒤 가정 파탄에까지 이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지요"
텔레비전에 한번 출연했다고 인생이 바뀔 수 없으며, 그런 기대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라는 충고를 덧붙였다.
정 PD는 영상 말고 다른 일에는 관심도 능력도 없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처음 영화·영상에 관심을 가졌고, 19살 때 첫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고 했다. 벌겋게 충혈된 눈, 6개월은 쉬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 1편 제작에 몸무게가 3㎏씩 빠지는 일… 하지만 정 PD는 이 일이 좋다고 했다. 바로 그 '사람' 때문이리라.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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