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모방과 개성

이제 인스턴트 식품 천국이 되었다. 밥이든 찌개거리든 없는 것이 없다. 편한 세상이다.

삭는 게 있으면 새로 솟는 것도 있다. 연기관련학과의 부상(浮上)이 대학입시의 새 풍속도 중 하나다. 특히 서울지역대학의 실기고사장을 들어서면 뜨거운 연기경쟁을 실감한다.

전공자의 한 사람으로 뿌듯하기도 했으나, 그 보다는 안타까움이 더한다. 수험생 개개인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몇 분인데, 학생 태반이 이 귀중한 시간을 전형적 인물의 모방이나 영화 또는 TV스타 흉내내기에 소비하는 것이다. 한 수험생은 심청 흉내를 아주 능청스럽게 잘 해내 그 자체로는 기특하기까지 했고, 나는 지금까지 그 수험생의 몸짓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은 것 역시 기억한다. 어디서 본 듯한 잘 조작된 심청의 몸짓만 눈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다른 학생들도 대개 그런 식이었다.

모방방식이나마 개성이 있다면 덜 답답했을 것을. 그런데 모방패턴 또한 대체로 획일적이어서, 답답함을 넘어 기이하기까지 했다. 어쩜 이렇게 베끼기식 패턴이 치열한 경쟁의 주도적 양상이 되었는가. 감각적이고 포스트 모던한 몸짓에 익숙한, 그래서 개성미가 돋보이는 이 시대 청소년들이 연기만 접하면 고리타분한 모방에 노련해지는 이유가 뭘까?

모방은 습득이 비교적 빠르다. 반면 연기는 습득이 아니라 발견을 통한 자각이고 이 자각은 통증과 인고(忍苦)의 시간을 수반한다. 또한 모방은 이미 있는 모델을 눈썰미로 익히니 상상력이 소프트웨어인 연기와는 무관하다. 재주꾼의 재주와 연기의 본질을 한 데 묶을 수 없다는 말이다. 오디션이 특히 그렇다. 타자(他者)의 몸짓 베끼기가 아니라 자기 내면탐구의 생경함이 그 핵심이다. '쉽게 먹는 떡'으로 오해된 오디션은 백 번을 반복해도 보기 민망한 억지연기만 나열된다.

간단한 음식주문에도 절차가 있어, 식당 문을 열자마자 뭘 먹겠냐고 묻는 종업원은 없다. 만약 앉기도 전에 주문 닦달이 오면 분명 당혹스러울 것이다. 우리의 의식이 이런 류의 당혹감만 흔적으로 남기는 "빨리빨리"문화로 이미 찌들지나 않았는지, 어쩌다 이런 성급함이 연기지원자에까지 전이되었는지, 당혹스럽다.

가야대 교수.연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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