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위안부 증언 이용수 할머니의 아픔들

등록된 국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지금까지 200여명. 1992년 등록이 시작된 뒤 점차 수를 늘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 중 52명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 해외에 생존한 피해자도 20여명. 일제가 한국 외에도 중국·필리핀·인도네시아 등에서 강제 동원한 위안부 숫자는 적게는 5만명, 많게는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끌려갈 당시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 10대였다.

대구 상인동의 이용수(74) 할머니도 그 중 한 사람. 할머니가 납치된 때는 1943년 10월, 보름달이 조금씩 기울어 가던 밤이었다. 경주·평양·중국을 거쳐 대만에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1946년 부산항을 통해 돌아왔다. 기차 창문 너머로 복사꽃이 눈처럼 날리던 날이었다.

"돈 벌려고 갔다고? 나는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됐어. 우리 부모님들은 내가 돌아오던 날까지 내가 어디 갔었는지조차 몰랐어. 죽은 줄 알고 제사까지 지내고 있었어좭.

할머니는 최근 일본에서 흘리는 '자원설'을 단호히 일축했다. '정신대'니 '위안부'니 하는 낱말마저 1992년에야 알았다고 했다. 끌려간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역시 그때까지 몰랐다. 함께 끌려갔던 여자 5명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왔다.

귀국 후에도 밤마다 공포에 시달렸다. 누군가 자신을 잡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1992년에 정신대 희생자를 찾는다는 말을 들었을 땐 나서지 못했다. 자신이 그런 사람인 줄도 몰랐다. 또 잡으려고 그러나 싶어 오히려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을 뿐이었다.

위안부 문제로 나라가 떠들썩했던 뒤에야 동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후 전국은 물론이고 일본·대만을 찾아 다니며 자신이 겪었던 수많은 일들을 증언했다. 외고 있던 일본 군가도 수없이 불러 보였다.

할머니는 매일 밤 레고를 맞추듯 흐트러진 기억을 제자리에 갖다 앉히느라 고심한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사. 그렇지만 그만 둘 수 없다. 할머니의 반추야 말로 숨겨진 일제의 만행을 밝히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일 터이기 때문이다.할머니는 뒤늦게 공부도 시작했다. 지식을 갖춰야 위안부의 희생을 조금이나마 더 빠르고 정확히 정리해 낼 수 있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경북대 명예 대학생 3년 과정, 명예 대학원 2년 과정 등을 마쳤다. 국제법도 배웠고 여성학도 배웠다. 그리고 오늘, 2001년 3월7일, 졸업식을 가졌다.

할머니의 귀 안에는 겨울에도 봄에도 매미가 산다. 일본군으로부터 머리를 심하게 두들겨 맞은 이래, 60년 가까이 매미와 함께 살아 왔다. 매미가 하도 울어대는 통에 잠을 청하기도 힘들다. 허벅지엔 일본군이 그은 칼자국이 시퍼렇게 남아 있고, 정강이와 허리엔 군화 자국이 움푹하게 패어 있다. 전기 고문조차 붙잡힌 첩자에게만 가해지는 형벌은 아니었다.

몸엔 언제나 싸늘한 한기가 돈다. 전기 장판을 덧깔았지만 춥기는 마찬가지. 외출 할 때면 얼굴과 목에 복면처럼 목도리를 친친 둘러싸야 한다. 그래도 할머니는 견딘다. "말라리아에 걸려서도 살아 남았던 몸이야". 혼자 사는 할머니의 방엔 약병이 어지럽다. 하루에 한번씩 혹은 끼니마다 챙겨 먹어야 한다. "챙겨 먹어야 한다. 아프면 안되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좭 넋두리처럼, 어쩌면 다짐처럼 아프면 안된다고 주문을 외는 것도 할머니의 오래된 습관이다.

세월은 강철도 녹일 만큼 파괴력이 무섭다지만, 할머니에게는 빈말 처럼 들린다. 60년 가까운 세월, 낯선 것은 언제나 낯설었고 아픈 곳은 변함없이 아팠다. 1943년 10월 어느날 밤 이후 할머니의 삶은 언제나 누추했다. 팔이 아프도록 문질러 봤지만 칙칙한 삶엔 윤기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름을 쳐도 여전히 서걱서걱 모래 낀 소리만 낼 뿐이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이 초라해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결코 안으로 도망치지는 않는다. "숨어 지낸 세월은 그만하면 됐어.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내가 당했던 것들, 내가 기억해 낸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해. 남은 시간이 너무 짧아 쉴 틈이 없어". 남편도 자녀도 없는 할머니가 늘 바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조두진기자 earful@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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