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아니게 3월에 내리는 눈을 서설(瑞雪)이라 위안 삼는다. 대지에는 봄빛이 살아 꿈틀대는데 무심하게도 눈발들은 아직도 겨울을 부여잡고 있다.
얼마 전부터 목련이 심상치 않게 흥분하더니 꽃망울을 밀어 올리기 시작했다. 수 차례의 찬비를 이겨내고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햇살 아래에서도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완연한 봄은 목련의 신호를 기다린다. 목련이 하얀 꽃치마를 차려입으면 멀리 있는 잡목 숲도 서서히 연둣빛을 띠리라. 해마다 봄은 그렇게 왔다. 혼돈과 무질서를 통과제의처럼 받아들이고 난 뒤 봄은 탄생하는 것이다.
##나무가 살아가는 법
베란다에 자스민과 군자란도 앞을 다투어 꽃망울을 과시하더니 오늘은 쏟아지는 눈을 보고 지레 창백하다. 늘 적절한 환경 속에서 지루하게 살아가는데 익숙해져 버린 화초들. 후두둑 실밥이 터지듯 꽃이 피었다 질 것이다. 화초에게 봄은 희미한 뒷배경일 뿐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피었다 지기를 그저 반복한다. 목적없이 지고 피는 삶이 그들에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무처럼 살고 싶어 정초에 겨울산을 오른 적이 있다. 나목들은 저마다 침묵 속에서도 생존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가지마다 섬세한 촉각들이 살아서 길을 내고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무서우리 만치 적막한 숲에 채앵 채앵 바람을 튕겨내는 겨울 나무의 자존심만 가득하다. 순간 바람이 긴장한다. 겨울 숲에 가면 내가 낯설어진다. 툭툭 살집이 터진 신갈나무를 두 손으로 감싸안고 생명의 펌프질을 느낀다. 나도 겨울산도 포근하다.
저 멀리까지 군락을 이루면서도 정체성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자작나무의 아픔이 보인다. 우아한 외형과는 달리 그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무리를 이루었기에 자작나무 숲은 더욱 빛나는 법.
##혼란.좌절 속에서도 자연의 질서따라
수종이 다른 나무들은 적당하게 거리를 두고 숲의 일원이 되는 법을 터득한다. 아름드리 고목이 어린 나무를 부러뜨리고 뿌리째 나뒹굴고 있어도 언제나 숲은 평온하다. 숲이 아름다운 까닭은 변덕스런 바람과 비와 폭설이 남기고 간 상흔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련없이 버릴 줄 알기에 봄을 향한 겨울 나무의 몸부림은 눈부시리라. 무심을 되뇌이는 것조차 변형된 집착이라며 겨울나무가 꾸짖는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나무에게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문명이 넘쳐나는 도시 속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사람들은 살기 위해 도시로 모여들지만 자기에게는 죽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고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말했다. 도시에서 숱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느끼지 못한 것들. 정녕 우리가 잃은 것은 겨울 나무가 가진 자존심이 아닐는지.
##인간의 삶도 나무를 닮았으면
비단 같은 수피를 켜켜이 벗어내며 자기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스레 나무를 닮고 싶다. 고통으로 점철되는 삶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사스레 나무가 존재하는 이유일 게다. 얼마 후 나는 도시에서 수많은 겨울 나무를 보았다. 숱한 혼란과 좌절 속에서도 자연의 섭리처럼 질서를 찾아가는 맑은 영혼들. 이국 땅에서 살신성인을 실천하다 전철로 뛰어든 이수현군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사명을 다하다 사라져간 소방대원들의 비보. 그것은 나무보다 고결하고 숭고한 삶이다.
꽃망울을 터뜨리려다 말고 몇 차례나 움츠러들어야 하는 목련을 바라본다. 봄은 결코 쉬이 오는 것이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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