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일본에서 지방분권의 주 과제는 중앙정부가 결정한 행정을 지방정부가 집행하는 '집권적 분산체제'를 '분권적 분산체제'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난해말 대구에서 열린 21세기발전모델포럼에서 진노 나오히코 일본 동경대 교수는 "일본은 이미 제2차대전 이후를 계기로 집중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지방세출의 비중이 증가하는 집권적 분산체제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풀뿌리민주주의의 시발점에서 제기된 한국의 '지방분권' 과제는 일본과 미국, 유럽 등 지방자치의 전통이 강력한 국가와는 차원을 달리하고 그 때문에 더욱 절박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이들 대다수 선진외국은 지방자치의 뿌리가 '분권'이 필요없을 만큼 제도화돼 '근본적 전환'을 필요로 하는 한국의 중앙집중체제와는 극히 대조적이라는게 학계의 진단이다.
이재은 경기대 교수는 "일본은 우리의 읍면동에 해당하는 시정촌의 범위가 지나치게 나눠져 심지어 통·폐합이 거론될 정도"라며 "반면 한국은 90년대 초반 꾸려진 지방자치기획단부터 중앙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해 분권이 지지부진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중앙정부가 지방재정 분권을 논의하고 있으나 국세의 대폭적인 지방세 이전이나 지방재원 확충 차원이 아니라 보조금이나 교부금을 일부 늘리면서 재정운용권은 내놓지 않으려는 속셈을 갖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방에 '떡고물'만 흘려주면서 그나마 '먹는 방식'은 중앙에서 결정하겠다는 집권적 발상이라는 것.
더욱이 중앙권한의 관리 측면에서도 '정당공천권' 등을 통해 지방정부를 옥죄며 중앙정치권의 꼭두각시로 전락시킨 형태가 한국 지방자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그러면 이미 오래전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진 선진외국의 지방자치와 '분권' 현실은 어떤가.
일본은 지난 93년 '지방분권추진위원회'를 설치해 지난해부터 '지방분권 일괄법'을 시행했으며 현재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할 역할을 명확히 규정, 국가 권한을 도도부현(광역단체)으로, 또 도도부현의 권한을 시정촌(기초단체)으로 넘기는 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지난 82년 '코뮨(시·읍·면), 데파르망(도), 레종(주)의 권리와 자유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지방분권을 본격 추진한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각국은 '유럽통합'의 기치아래 지역의 권한강화와 재정확보로 지역차별을 없애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통일 이후 동·서독 지역간 이원화 현상을 막기위해 연방정부의 관청중 8개는 본에 두고 10개는 베를린으로 옮겨 지역간 균형발전을 꾀한 독일의 분산정책은 분단현실의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과세자주권 등 제도 민주화
▨일본=일본의 지방자치는 제2차대전 이전 중앙집권적 관치형태에서 시정촌(읍면동)제를 시행한 1889년을 기점으로 100여년의 역사를 갖는다. 특히 전쟁 이후 자치단체장의 주민직선과 지방의회의 권한강화, 주민의 직접청구제도 등 제도의 민주화를 가져왔다.
나아가 지난 93년 '지방분권추진위원회'를 설치한 이래 지방분권 운동을 활발히 벌여 중앙정부의 지방통제 방식인 기관위임사무 폐지, 지방소비세 신설 및 주민세의 지방소득세로의 전환 등 일정정도 권한과 재정의 분산이 이뤄졌다.
특히 최근에는 '지방제도조사회'가 '주민자치제도와 지방세 재원의 충실확보에 관한 답신'(2000년 10월25일)을 내놓을 정도로 변화의 발걸음이 빠르다. '답신'의 주요내용은 법인사업세의 외형과세표준의 도입 등 '과세자주권' 확보를 비롯해 새로운 주민참여방안, 지방의회 역할증대, 주민소송유형의 재구성, 직접청구제도 및 주민투표제 보완 등이다.
주민참여·자치폭 대폭 확대
▨프랑스=선진외국중 상대적으로 가장 중앙집권적인 지방제도를 갖는 프랑스는 지난 82년 '지방분권법'을 제정한 이래 지방제도 개혁을 통한 지방분권적 형태로 나아가고 있다.
국가의 지방에 대한 감독권한을 축소하고 데파르망(도) 지사제도를 폐지하는 등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또 권한 이양에 따른 재정부담은 국가가 전액 보상하고 분권화를 위한 보조금을 신설하는 등 지방자치단체의 자율권을 일부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국가가 자치단체에 강력한 통제력을 갖고 지방자치단체가 국가의 기관적 성격을 띠는 등 중앙집권적 경향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프랑스 민주주의가 많은 국가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주민들의 참여와 자치의 폭이 넓다는 점이다. 결국 프랑스가 '중앙집중'의 폐해를 극복하고 있는 요체는 '(지방자치)단체의 자치' 대신 '주민 자치'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력 분점 동서 갈등 해소
▨독일=16개 주로 구성된 독일은 지방자치단체로 크라이스(군), 게마인데(시·읍·면) 등 2층제를 두고 있으며 크라이스에 속하지 않는 크라이스프레 스타테(특별시)는 단층제로 구성돼 있다.
독일연방은 국방·외교·경제·사회보장 등 거시적 정책을 관장하고 주정부는 교육·경찰·공공보건 등 주민들에게 밀접한 미시적 정책을 담당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통일 당시 구동독의 1인당 국내생산은 서독의 3분의1 이하였으나 이후 '독일 통일기금'을 바탕으로한 연방정부의 재정원조로 동독의 재정적자가 상당부분 해소됐으며 정부기관의 분산배치 등으로 지역간 균형발전이 이뤄지고 있다. 특히 독일의 공공서비스는 연방, 주, 자치단체 등 3계층으로 분담돼 재정지출비중도 35.5%, 38.7%, 25.8%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중앙정부와 주정부, 자치단체들간의 권력 분점이 지역갈등을 해소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감세 등 '작은 정부 구현' 추세
▨미국=미국은 80년대 이후 '신연방주의'의 팽배로 주(州)의 권한이 강화되고 보조금 등 연방지원은 축소되는 '작은 정부의 구현'이 이뤄지는 추세다. 감세와 세출삭감, 규제완화 등 개혁조치가 뒤따랐다.
자치단체들의 복지지출 삭감과 공공서비스 민간화를 촉진으로 주민들의 자치환경도 정착돼 있다.
뉴욕시의 경우 이미 75년부터 59개 지구별로 구청장이 임명하는 구민과 지구출신 시의원으로 구성된 '커뮤니티 위원회'가 주민참여의 동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지구내 복지관련 공청회·상담, 지구내 종합계획에 관한 의견제출, 행정수요조사, 토지이용 심사에 관한 공청회 개최 등 '주민자치'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
김병구기자 kb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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