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간데스크-깜박이 안켜는 사회

운전면허시험 장거리 운전에서 중요한 체크포인트 중 하나가 깜박이(방향지시 점멸등)를 켜는 일이다. 출발할 때 반드시 좌측 깜박이를 넣고 교차로에서도 적합한 깜박이를 켜야 한다.

그런데 이 간단한 동작을 깜박 까먹고 그냥 출발하는 바람에 시작부터 감점을 당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안전벨트 매고 깜박이 넣고…"하는 식으로 달달 외우다시피 해서 운전석에 앉지만 긴장한 탓에 앉자마자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론과 실기 사이의 괴리와, 실습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지만 운전자들은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깜박이 넣기를 몸으로 익히게 된다.

깜박이는 운전에 필수적이다. 차량의 진행방향을 제시하는 것 외에도 운전자의 여러가지 의사 표현 수단이기 때문이다.

깜박이 없는 대선 질주

대부분의 초보 운전자들은 깜박이를 잠깐 잊어먹기라도 하면 순간적으로 깜짝 놀랄 만큼 깜박이 켜기에 모범적이고, 무사고 운전자들은 이런 기본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운전에 약간의 자신이 붙게 되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깜박이 켜기에 소홀해지고, 시간이 갈수록 웬만한 경우에 생략해 버리고, 나중에 아예 그 쪽으로 습관화된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 정도로 생각하고 "운전만 잘하면 되지 귀찮게 깜박이는 왜 켰다 꺼야 하느냐"는 식으로 변하는 것이다.

초심은 대체로 그렇게 변질된다.

기초이고 약속이자 지켜야할 법규인데도 그렇다. 기본을 무시하고 공동선을 우습게 여기는 풍조에 다름 아니다.

뒷차가 오거나 말거나 깜박이도 안켜고 튀어나오지를 않나, 정차할 때도 그냥 덜컥 서버리지 않나. 난폭운전으로 끼어 들기나 차선바꾸기를 할때도, 좁은 소방도로나 편도 1차선도로에서 어기적거리다 슬그머니 정차할 때도, 깜박이는 없다. 뒤차를 깜짝 놀라게 하고, 따라가던 차들을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놓고는 제 갈길만 잽싸게 또는 게으르게 가는 제멋대로 차들. 심지어 신호등 없는 교차로에서도 깜박이를 켜지 않고 신나게 좌회전 유턴하거나, 도로 한 복판에 차를 세우고 태연히 볼일 다 보는 못말리는 운전자도 적지 않다.

좁은 아파트 단지에서 마주치는 차들도 마찬가지다. 정차하겠다는 것인지 어느 쪽으로 가겠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려줄 생각은 않고 서로 상대방만 노려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남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고 자기 편한대로 사는데 익숙한 한국인 특유의 조급함과 이기심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깜박이를 외면하는 사회가 정상적인 사회일 수 없다. 깜박이 켜기를 안지키는 풍조는 이미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돼 있다. 사회질서 위협하는 기만행위

깜박이 켤 줄 모르고 질주하다 좌초한 대표적인 사례가 IMF사태라 할 수 있다. 여야가 요즘처럼 싸우기만 하고, 제법 배웠다는 관료 학자들은 물론 언론들까지 공리공론으로 세월 보내다 깜박이 켤 시기를 놓친 탓에 빚어진 환란이었다.

앞서 가는 차가 시의적절하게 깜박이를 켜줘야 뒤따르는 차들이 수월하고 도로 전체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데도 우리 지도층은 깜박이 없는 일방 질주만 거듭하고 있다.

이미 대권쟁투에 들어간 정치권은 누가 뭐래도 정상을 향한 질주만 있을 뿐 국민들을 제대로 인도할 깜박이에는 관심이 없다. 대선주자로 거명되는 사람들 상당수가 국민들을 상대로 거짓말, 말바꾸기에 이력이 붙은 사람들이고 그들은 국민 기만행위로 손해볼 일 없고 손해본 적 없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국민을 그 나물에 그 밥 정도로 보고 있으니 우회전 깜박이 넣고 좌회전하는 짓이나 안한다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그 와중에 경제 역시 깜박이 없는 운행으로 또 다른 위기를 맞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지킬것은 지키자'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네 사람중 한사람, 즉 25%가 법은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젊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약.위법에 윗물 아랫물 논쟁이 무의미한 단계까지 가고 있는 것이다.

희망의 싹은 그래도 있는가. 깜박이도 안켜고 갑자기 팍 튀어드는 차와 자기 맘대로 우왕좌왕하는 차 사이에서?

경찰은 운전자 스스로 알아서 해도 될 안전벨트 착용 여부에 필요이상의 신경을 쓰지말고 사고유발의 주요 원인인 깜박이 신호 불이행부터 챙겨야 할 일이다. 깜박이라도 제대로 켜는 사회라야 희망이 보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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