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라시아 대륙을 달린다(11)

◈이르쿠츠크-(하)

이르쿠츠크 철도청에 시베리아 철도와 바이칼 호를 함께 담은 신문 1면용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흔쾌히 인력과 차량을 지원해 주었다. 안내를 맡은 이는 계약직으로서 60대 여성인 마리나 안토노브나씨. "바이칼은 언제 보아도 좋다"면서, 착하게 생긴 9살 난 손자를 데리고 왔다. 손자는 간간이 차멀미를 했고, 할머니는 전전긍긍했다. 할머니가 손자 아끼는 마음은 시베리아에서도 똑 같다!

시내를 벗어나자 산이 나타났다. 설원에 물린 몸 안에 푸른 기운이 감돌고 생기가 솟았다. 숲의 주인도 자작나무에서 보다 친숙한 소나무로 바뀌었다. 기후대가 바뀌었다는 징후다.

두 시간 정도가 흘렀을까, 저 멀리로 푸른 바다와 수평선이 펼쳐졌다. 바이칼호다.

언덕에 이르러 차에서 내렸더니 바람 앞에 선 키 작은 신수(神樹) 한 그루가 가지 마다마다에 무수한 천조각을 달고 서 있었다. 안토노브나씨는 준비해 온 천조각을 내밀었다. 나뭇가지에 천조각을 묶고 하늘을 우러르니 우주의 기운이 새삼 온 천지에 가득찼고, 바이칼호 푸른 물 위로 햇살이 공작의 날개처럼 장엄하게 펼쳐졌다. 학술적으로 한반도의 고대인들은 시베리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전한다. 빗살무늬토기의 흔적이 그렇고, 곰을 숭상하는 토테미즘의 기록이 그렇다. 그러니 이 신령스런 나무 앞에서 우리는 마땅히 경건해 질 수밖에.

바이칼 호 앞에 서니, 호수는 개념적인 문제에서라면 몰라도 감각적인 면에서는 호수가 아니라 바다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중국의 인공호인 서호(西湖)도 제법 크긴 하지만, 도대체 비길 바가 아니다. 호수는 러시아 부라티야 공화국과 이르쿠츠크 주에 걸쳐 있으며 길이가 640㎞, 너비가 평균 48㎞, 최대 길이는 79㎞이다. 호안선 전체 길이는 200㎞, 면적은 3만2천500㎡로 한반도의 1/7이다. 깊이는 1천637m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최대 투명도는 약 40m이다.

호수의 물은 비온 뒤의 계곡물처럼 깨끗하고 투명하다. 수량은 2만3천㎥로 전 세계 표면 담수량의 20%를 차지하고 있다. 동쪽 호안의 세렝가강을 비롯해 300여개의 강이 바이칼로 흘러드는데, 정작 흘러나가는 강은 남서 호안에서 북서로 흐르다 급격히 북류하는 앙가라강 뿐이다.

달린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유속이 빠른 앙가라강은 예니세이스크 상류에서 예니세이강으로 흘러 들어가고, 예니세이는 궁극적으로 북극해의 품에 안긴다. 감각적으로는 '바다'라고 부르고 싶지만, 바이칼 호는 호수, 그러니까 민물이다. 현대인들은 이 민물을 지구의 푸른 눈 '시베리아의 진주' 등등으로 부르지만, 고대인들과 지방민들은 현인(Old Man)' 그(He)' 라고, 신성한 의미를 부여해 인식한다. 바이칼은 옛 터키어로 풍부한 호수(rich lake)라는 뜻인데, 과학자들은 이 이름을 선호하고 있다.

바이칼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다. 나이는 2천500만년. 통상 길어야 1천500만년이 되면 소멸되거나 퇴적층으로 바뀌는 게 상례라서 과학자들이 매우 신기해 하고 있다. 지리학자들은 깊이 200m 이하의 깊은 물이 섭씨 4도 정도를 유지, 노화가 진행되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는 밝혀냈으나 더 이상의 원인은 모르고 있다.다만 수온 증가로 인한 늪지화가 진행되지 않고 갑각류의 일종인 보코플라프라는 생물이 자연 청소부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청정도가 유지된다는 정도를 밝혀냈을 뿐이다.

수중 동물도 풍부해서 확인된 2천635종 가운데 2/3가 이곳에 살고 있다. 동물도 1천200여종, 식물도 600종 이상이 서식하고 있다. 이 가운데 70% 이상이 바이칼에서만 발견되는 고유종이다. 바다표범과 오물이란 물고기는 유달리 관심을 모은다. 바이칼의 바다표범은 북극해의 바다표범과 닮았고, 오물은 연어의 일종이다. 둘 다 바다에서 사는 게 맞을 텐데, 민물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호수는 영성에 관심이 많은 지구인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영혼을 고양하기 위해 이곳을 찾고 있으며, 노보 부지사에 따르면, 그 수는 연 200만~300만명에 이른다.

일본 중국 독일 미국 몽골 영국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많이 찾아 오고 있으며 한국은 10대 관광 내왕국 가운데 하나다. 지난 99년 한해동안의 바이칼 관광수입은 27억6천800루블(한화 3조 3천216억원)이다. 추위가 극에 달하는 1, 2월에는 호수 전체가 꽝꽝 얼어서 그 위로 철도와 차도가 놓이기도 한다. 러.일 전쟁 당시에는 임시철도가 가설돼 군수물자 수송로로 이용되기도 했다.

주정부에서는 바이칼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 있다. 지역 수입의 15%는 바이칼 관광에 의존하고 있다. 154개의 공인 숙박시설과 유람선, 산악 스키장이 주 수입원이다. 바이칼의 특산 생선인 오물은 스프나 훈제 소금구이용으로 인기가 높고 바다표범은 고급 외투용으로 쓰인다.

바이칼의 차고 맑은 물은 양질의 술과 청량음료의 재료로서 미국과 호주 등지로 수출된다. 호수 주변에서는 운모, 대리석 채굴, 펄프 제지공업, 조선업, 공작기계 제작, 어업, 생선 가공업 등이 이루어 지고 있고, 주변 산맥에서는 금과 다이아몬드가 매장돼 있기도 하다.

바이칼은 이르쿠츠크 주민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선사하고 있는 셈이다. 호숫가에서 찬 물에 손을 씻고 자갈로 물수제비를 몇 차례 뜨고 났더니 안토노브나씨가 차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는 차 안에서 빵, 보드카, 햄으로 상을 차리고 건배를 제의했다.

그는 "바이칼에서는 보드카를 한 잔 해야 다시 올 수 있다는 말이 있다"고 소개했다. 소박한 제의(際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행은 안토노브나씨의 선창에 화답하며 건배했다.

"따바이!(합시다!)"

글:이광우기자

사진:강원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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