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유라시아 대륙을 달린다(12)

◈국제열차

이르쿠츠크 역에서 중국 베이징행 국제열차표를 끊는다. 러시아 통역겸 안내원은 비행기를 타고 이미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예정대로라면 열차는 울란우데를 지난 뒤 치타에서 몸을 틀어 만주벌판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러다가 러시아측 국경지역인 자바이칼스크에서 3시간 가량 바퀴를 바꿔 단 다음, 중국 국경지역인 만저우리(滿州里)를 통과하고, 하얼빈과 창춘(長春)을 거친 뒤 베이징에 닿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창춘에서 내려 비행기로 옮겨 타고 귀국해 버리면 될 일이다. 그리하여 당초 예정 코스의 역순이긴 하지만, 마침내 국내에 경험자가 거의 없는 만주횡단철도(TMR)―시베리아 횡단철도(TSR) 구간 답사는 완료될 것이다.

어둠의 여진이 남아 있는 오전 8시. 열차에 오르기 직전에 선로변 공중에서 참 아름다운 광경을 만난다. 대기 속의 미세한 얼음 결정들이 가로등 불빛에 반사돼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한밤 중에는 얼음 결정들이 지상으로 내려 오며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는데, 시베리아 사람들은 그것을 '별의 속삭임'이라 부른다고 한다. 겨울의 시베리아는 혹독하지만, 한편으로는 '동화'라고 불러야 마땅할 요소들이 숱하게 내재돼 있다.

열차에는 중국인 소규모 사업가들과 러시아 여행객들이 섞여 탔다. 몇 년씩 고향을 떠나 우크라이나에서 육체노동으로 돈을 모은 재중동포(조선족)들과 북한의 파견 노동자들도 보인다. 취재팀의 쿠페(4인실)에는 모스크바에서 베이징으로 여행을 가는 레냐 자매가 동승했다. 국제열차를 타면, 이처럼 남녀가 한 방에 드는 일이 간혹 생긴다. 언니는 세관 직원이고, 동생은 교사인데, 두 사람 다 대단한 거구다. 러시아어와 영어가 병기된 책자를 들고 이야기를 나눈다. 언니는 이 열차로 몇 차례 베이징을 다녀왔다고 한다.

열차는 바이칼 호의 남쪽 호안을 따라 달린다. 바이칼호는 서너시간을 따라온다. 바이칼호, 그 거대함이 새삼 피부에 와 닿는다.

열차는 브리야트 자치공화국의 수도로서 TSR의 몽골 분기점인 울란우데를 지난다. 여기에서 방향을 틀어 내려가면 몽골의 울란바토르가 나타날 것이다. 라마교의 총 본산인 울란우데에는 한국인을 닮은 소수 민족 브리야트인과 오로치인이 살고 있다. 도시의 북쪽에는 타이가 삼림지대가 펼쳐져 있다니, 울란우데는 기후의 경계지점에 자리잡은 도시라고 해야 하겠다. 역에 내려 보니 황색 피부의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한쪽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분주한 몸짓으로 삼성과 LG의 가전제품 100여개를 수습하고 있다.

치타가 가까워 지면서부터 완만한 언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저 멀리 언덕에 검은 물체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방목된 소들이다. 철로변의 소박한 집들의 외양간에는 건초더미가 쌓여 있다. 나른한 평화로움이 창밖에 그득하다.

그러나 풍경이 평화로움만으로 점철돼 있는 것은 아니다. 언덕 군데군데에 자리잡은 토치카와 탱크도 눈에 들어온다. 대공포(對空砲)도 보인다. 국경지대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열차는 어느덧 자바이칼스크에 닿는다. 러시아의 철도는 레일 폭이 152㎝로 광궤인데, 중국 철도는 143.5㎝로 표준궤라서 국제여객열차와 화물열차는 이곳에서 바퀴를 바꿔 달아야 한다. 중국쪽에서 러시아로 올라간다면 만저우리에서 바퀴를 교체할 것이다.

바퀴 교체는 차체를 2m정도 들어올려서 한다. 소요 시간은 대략 1시간 30분~3시간 정도다. 승객들은 그동안 대합실에서 기다려야 한다. 바깥 출입은 통제된다. 모르는 척 대합실을 벗어나 열차 쪽으로 다가가자 경찰과 직원들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완강하게 제지한다.

대합실 식당에서 재중동포 부부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북한 노동자들이 흘깃흘깃 쳐다본다. 그들은 자신들끼리 모여 있고, 분위기가 딱딱하다. 상황파악이 명쾌하게 안돼 의사 소통을 포기하고 만다. 시베리아는, 아직까지는, 불안한 곳이다.

다시 탑승하자 러시아측 경찰 2명이 올라와 비자용지를 회수해 간다. 러시아는 여권에 비자 도장을 찍어주는 게 아니라 별도의 용지에 비자 도장을 찍어주고 출국시에는 회수해 버린다. 따라서 여권에는 기록이 남지 않는다.

열차는 중국 국경으로 들어선다. 러시아어를 한자가 대체하기 시작한다. 만저우리. 국경지역이다. 다시 열차가 멈춰 서고 중국측 공안원들이 승차해 비자 검사를 한다. 노트북을 지지대에 올려놓고 두드리는 품이 매우 세련됐다. 러시아가 아직까지 '오프라인'이라면 중국은 세계적 수준의 '온라인'이다. 중국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영어 통역을 맡은 간부급 공안원이 여권을 뒤적이더니 잠깐 내리라고 한다. 단수 비자인데 이미 한 차례 출.입국을 했으니, 비자를 새로 발급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입국심사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걱정 말라"던 통역관이 굳은 표정으로 되돌아 온다. 그는 긴장된 표정으로 "기자냐?"라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면서 "취재는 하지 않고 창춘에 가서 비행기를 타고 곧바로 귀국할 것"이라고 했는데도, 펄쩍 뛸 듯한 태도를 보이더니, 어딘가로 가 버린다. 30분쯤이 지났을까. 그는 우리를 입국심사대 옆 방으로 안내하더니 "비자를 내줄 수 없다. 상부의 엄중한 지시다. 더 이상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이해해 달라"고 한다. 이제 러시아 비자도 없는데 무슨 말이냐고 하니, 아침에 자기들이 러시아 비자를 받아주겠다고 한다. 중국 정부가 기자와 교수의 자국내 활동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별이 무심히 반짝이고 눈발이 가볍게 흩날리는 만저우리 국경 마을의 한 웃바람 센 호텔 방에서 공안원들의 감시/보호(통역관은 누누이 '감시(surveillance)가 아니라 보호(protection)'라고 강조했다)를 받으며 새우잠을 잔다.

날이 밝자 공안은 자바이칼스크 국경에서 러시아 비자를 받아준다. 우리는 장래를 예측할 수 없어 내심 불안하지만, 공안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중하고, 친절하다. "당신들의 친절을 기억하겠다"고 말하니, 그도 미소지으면서 악수를 청한다.러시아측에서 발급한 비자를 보니 치타와 하바로프스크행이다. 러시아에서는 비자를 받을 때 체류할 지역을 명시하고, 해당 지역에만 머물러야 하므로 우리는 무조건 치타로 다시 나가 하바로프스크로 가는 열차를 타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 자바이칼스크~치타 구간 야간 완행열차의 플라취카르트(6인실)는 개방형 침대칸으로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발치의 복도를 지나다닌다. 고장난 문은 열리고 닫힐 때마다 여지없이 해머로 후려치는 듯한 소리를 내서, 막막하고 불안한 잠자리를 더욱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

오전 6시 30분. 치타역에 내리니 영하 37℃다. 우여곡절 끝에 하바로프스크행 표를 확보하고, 역 부근 마을을 30분 가량 어슬렁거리는데, 플라스틱 물통의 물이 부분적으로 얼어버린다. 그런데도 철교 건너편 마을 입구에서 황인종과 백인종의 아이들은 얼음판 위에서 레슬링을 하고 있다.

극동행 열차의 쿠페에는 블라디보스트크에서 활동하는 소방관 2명이 동승했다. 니콜라이라는 이름의 소방관은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생선통조림을 안주로 내놓으면서 보드카와 맥주를 권한다. 한국의 기자들이란 사실이 알려지자 여러 사람이 방으로 찾아온다. 귀대하는 포병장교, 벌목기술자, 몽골과 소규모 무역을 하는 30대의 여자, 학생.... 올가라는 이름의 30대 여자는 영어를 할 줄 알아서 통역 구실을 수행한다. 그는 "중국은 잘 사는 나라가 되었는데 러시아는 너무 가난하고 앞으로도 나아질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면서 언뜻 눈물을 비친다. 와중에 술자리만 12시간이 흐른다. 좋게 보면 쾌활하고 나쁘게 보면 무례한 시베리아의 주인들은 손님을 놓아주질 않는다.

하루 밤낮이 지났는데도 열차는 계속 달린다. 35시간이 지나야 열차는 하바로프스크의 아무르강 철교위를 달리게 될 것이다.

글 :이광우기자

사진:강원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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