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처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끼는 봄노래
삼짇날이 코밑에 닥쳤는데 아직 봄 같지 않다. 꽃샘추위가 드셀 때는 마치 겨울이 새로 닥치는 것 같다. 그러나 풀리는 듯 싶다가 갑자기 추워지기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봄날씨의 전형이 아닌가. 꽃샘추위 없이 따뜻하기만 한 봄은 없다. 그러한 봄은 우리의 봄이 아니다.
민족통일의 봄도 마찬가지이다. 김대중 정부가 마련한 남북화해의 봄은 부시정부의 대북 강경론과 북한의 거친 저항으로 한파를 만난 셈이다. 과거에도 그랬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7.4 공동성명으로 화해 기류를 조성했으며, 김영삼 정부도 남북정상회담 약속까지 갔다. 그러나 김주석 사망이나 조문파동처럼 통일의 봄을 시샘하는 뜻밖의 사태를 만났다. 지금 부시정권의 대북 정책과 국내 보수파들의 김정일 답방 반대 주장도 통일의 봄을 시샘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분단현실이다. 그러면서도 통일의 봄은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다. 봄이 어떻게 오고 있는가. 봄노래를 들어보자.
앞들에도 울긋불긋/ 뒤뜰에도 울긋불긋
행화도화 만발한데/ 춘월춘흥 이 벌 저 벌
서로 섞여 왔다갔다/ 맑고 푸른 반공중에
종달새는 지지배배/ 버들장마 깊은 쏘에
금빛 옷을 떨쳐입고/ 꾀꼴꾀꼴 우는 꾀꼴
봄노래는 흔히 노랫가락으로 부른다. 봄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니 '얼시구 절시구' 노랫가락이 나올 만하다. 그러나 사설은 봄의 풍광을 회화적 기법으로 노래하는 독창성을 보인다.
대지에다 봄빛을 상징하는 꽃분홍 물감부터 흩뿌린다. 따라서 앞뒤 들도 울긋불긋 하지만 앞뒤 동산도 울긋불긋하다. 그리고 거기다가 살구꽃과 복숭아꽃의 아름다움을 그려 넣는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벌들이 날아든다. 다른 노래에서는 '행화도화 만발한데 춤을 추는 저 나비야' 하며 나비도 빼놓지 않는다. 벌나비들의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리고 나서, 시선을 하늘쪽으로 돌린다. '맑고 푸른 반공중에 종달새는 지지배배' 노래한다. 샛노란 꾀꼬리 또한 봄을 알린다.
봄의 풍광을 땅과 하늘로 양분하여 울긋불긋 화려함과, 맑고 푸른 시원함을 아래위로 병립시켜 시각적으로 그려내는 한편, 봄의 소리 또한 '지지배배'하는 탁음과 '꾀꼴꾀꼴'하는 경음의 두 지저귐 소리를 선후로 대조시켜 청각적으로 들려준다. 바탕 화면 위에 꽃과 나비, 새가 그려져 있으되 화조도처럼 정적인 화폭이 아니라 다양한 배경음악들이 함께 곁들인 동영상처럼 생동감 넘친다.
봄의 풍광은 들과 산, 하늘만으로 다 나타낼 수 없다. 하늘이 대지와 위아래로 맞선다면 물은 대지와 아래위로 맞선다. 소살대며 흐르는 물소리도 봄을 알린다. '삼월삼짇날 제비는 날아 호접은 편편/ 나무나무 속잎에 가지가지는 꽃이 피고', 거제군 주순선씨 노래이다.
천방정 지방정 오돌돌 방구새
건뒤편편 마주쾅쾅 물은 술렁 버꿈은 수쩍
봄의 상황이 한층 구체적이다. 삼짇날이면 제법 봄기운이 완연하여 나무마다 속잎이 나고 가지마다 꽃이 핀다. '천방정 지방정 오돌돌' 바위 사이를 흐르는 산골짜기의 물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정겹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물소리가 달라진다. "건뒤편편 마주쾅쾅 물은 술렁" 한다. 바위틈을 요모조모 피해가며 흐르던 물이 이제는 서로 합세하여 물살을 이루고 제법 바위에 온몸을 부닥뜨리면서 쾅쾅 충격을 준다. 물살에 힘이 붙은 것이다. 거기다가 뻐꾸기와 소쩍새 소리까지 곁들였다.
꾀꼬리 노래를 하고/ 호접들은 춤을 춘다
아마도 이 봄을 맞아서/ 우리 벗님은 어데를 갔나
꽃과 내·새·나비가 춤과 노래로 어우러졌다. 그러고 보면 봄노래로 갖출 만한 것은 다 갖춘 것 같은데, 사실은 주인공이 빠졌다. 아무리 봄놀이가 신명나고 흥겨워도 벗과 더불어 즐기지 못하면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다. 이때 '벗님'은 벗이기도 하고 님이기도 하다. 님이 떠나 버린 봄은 아예 겨울이나 다름없다. 님 없는 봄보다 봄 없는 님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봄아 따뜻한 봄아/ 청춘남녀가 피끓는 봄아
있는 사람은 질거운 봄/ 없는 사람은 외로운 봄
일년 가운데에 봄철은 사춘기나 다름없다. 계절적으로 들뜨는 시기이다. 특히 청춘남녀들의 봄앓이는 더 치열하다. 신안군의 김부단 할머니는 이를 두고 '청춘남녀들의 피 끓는 봄'으로 노래했다. 그러면서 있는 사람은 즐거운 봄이지만 없는 사람은 외로운 봄이라고 했다. 이때 있고 없는 것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님일 것 같다. 그러나 있고 없음은 님만이 아니다.
있는 사람의 즐거운 봄/ 없는 사람의 피 끓는 봄
연년히 봄 올 때마다/ 타는 요 가슴 다 타느니
가슴만 탈뿐이 아이라/ 온전만신이 다 타는 듯
상주 공검면의 정학임 할머니 노래이다. 느닷없이 있는 사람은 즐거운 봄이고 없는 사람은 피 끓는 봄이라 했다. 아무런 설명이 없지만, 한갓 청춘남녀의 사랑타령만은 아닌 것 같다. 살림살이에 따라 봄의 처지가 크게 다르다. 있는 사람은 봄나들이하며 즐기기 딱 좋은 시절이다. 그러나 없는 사람은 봄이 즐겁기는커녕 오히려 봄이야말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의 계절이다. 가장 넘기 어려운 보릿고개가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없는 사람들은 해마다 봄이 되면 가슴이 다 탄다. 굶주리는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지 못하는 어른들은 가슴 뿐만 아니라 '온전만신'이 다 탄다. 온몸이면 그만인데, '온 전신', '온 만신'하다가 그것도 모자라서 '온전만신'이라 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온몸이나 전신을 이보다 더 몽땅 대상화해 줄 표현이 또 있겠는가. 그 만큼 없는 사람의 봄은 절박하다. 얼마 전에 무더기로 해고된 근로자들의 처지가 아마 이짝일 것이다.
이처럼 봄이 오면 즐거운 사람 못지 않게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반드시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조성한 남북화해 분위기와 통일의 봄을 시샘하며 안달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무기업자들이 그들이다. 통일이 되면 무기를 팔아 이익을 챙기는 데 막대한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사람들이나, 김대중 정부가 공연히 미운 사람들도 남북화해가 달갑지 않다. 공산주의자들과 손잡고 화해하는 일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가 하면, 김 대통령이 통일의 공적을 혼자서 누릴까 여기는 엉뚱한 시샘으로 속이 들끓는 탓이다.
북한을 깡패집단으로 매도하고 우리 대통령을 박대한 부시 정권도 통일의 봄이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당장 미군 주둔 명분부터 사라질 뿐 아니라 군산복합체의 미국 경제에 불이익이 초래되기 때문이다. 부시 정부가 공공연히 무기 구매를 요구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러나 꽃샘추위가 결코 봄을 막을 수 없듯이, 부시 정권 또한 통일의 봄은 절대 막지 못할 것이다. 봄이 자연의 순리이듯이 통일 또한 역사의 순리 아닌가. 부시처럼 통일을 거부하는 반동 세력들을 끌어안고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데 제각기 자기 자리에서 힘을 보태야 할 때이다. 우리 정부는 공연히 해고 노동자들 몰아붙이는 일에 힘 자랑하지말고, 줏대 있는 외교력 발휘로 외세에 꿋꿋하고 통일에 강한 정부의 면모를 보여야 할 것이다. 통일의 봄은 벌써 우리 곁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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