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것, 흔하고 흔한 것은 별 볼일 없다. 그런데 별 볼일 없는 것을 취하면, 그냥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사라지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다. 별 볼일 없는 것을 취한 사람을 결국 별 볼일 없게 만든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환경이나 경제, 정치뿐만 아니라 학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나에게 쉬운 것의 심각성을 깨우쳐 준 분은, 독일 유학 당시의 지도교수였다. 모르는 자가 용감하다고 했던가? 나는 한국에서 가르치지도 않고, 유럽인이 아니면 거의 전공하지도 않던 서양 중세철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늦은 나이에 겨우 독일어를 익혀 대학에 들어가니, 내가 읽어야 할 책들은 독일어나 영어가 아니라, 라틴어로 쓰여진 서양고전이었다. 그 중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를 전공하다보니, 이름만 듣고 본 적은 없는 '철학대전'과 '신학대전'을 읽어내야만 했다. 이들은 그냥 몇 권의 책이 아니라 수십 권에 이르는 전집이었다. 게다가 라틴어로 쓰여졌다. 동양의 고전이 한문으로 쓰여진 것처럼, 서양의 고전은 대개 라틴어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나는 분량도 분량이지만 라틴어는 해석이 까다로워,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영어와 독일어 번역판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가 꼭 읽어야 하는 '철학대전' 3권의 독어판이 목록에는 있는데 서가에는 없었다. 결국 지도교수를 찾아가 독어판 3권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나의 손을 끌다시피 도서관으로 데려가 라틴어판을 뽑아주었다. 독어판을 찾고있었다고 얼버무리니까, 당신에게는 라틴어나 독어나 같은 외국어인데 왜 하필 독어판을 찾느냐고 되물었다. 나는 읽기에 그나마 좀 쉽고 빠르다고 대답했다. 그 때 지도교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쉬운 것에는 더 배울 것도 없다. 애써 배울 것이 없으므로, 쉽지 않겠는가? 배운다는 것은 복잡한 미로를 빠져나가는 것이요, 빠져나간 뒤의 미로는 미로가 아니라 쉬운 길이다. 쉬운 문제를 해결하고 자랑스러워한다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별 볼일 없는 자로 인정될 것이다"
비단 학문뿐이랴! 난제는 혜안을 길러내고, 난관은 강자를 길러낸다. 그러나 별 볼일 없는 것을 찾는 자는 결국 별 볼일 없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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