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나오는 리어는 삶의 모든 가치를 '있음'이란 잣대로 재는 인물이다. 그러나, 리어의 있음은 그저 존재함이 아닌 존재의 '넘쳐흐름'을 일컫는다. 이는 풍성함이 곧 리어의 잣대요 그의 왕국이란 뜻이다.
사랑에 대한 진의 파악도 역시 이 잣대로 행해진다. 왕은 어느 날 딸 셋 모두를 한 자리에 앉히고는 묻는다. "딸들아 날 얼마나 사랑하는고?" 물음이 이미 답인 셈인데, 기다렸다는 듯 움직이는 첫째와 둘째의 입은 바쁘기만 하고, 왕은 이 말 잔치를 만끽한다. 그러나, 같은 질문에 대한 막내의 반응은 언니들과 사뭇 다르다호칭이 암시하듯이 코딜'리어'는 리어의 분신 같은 존재. 그만큼 바람도 큰 왕이 코딜리어에게 느긋이 묻는다. "자 이제 우리 막내도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 "할 말 없습니다" 단숨에 돌아온 대답이다. "뭐라?" 왕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왕이 '하고 싶은'이라고 한 것의 속뜻은 '얼마나 많은'인데, 없다니? 제 귀를 의심한 왕이 황급히 되묻지만, 막내는 요지부동 '없음'의 미학으로 맞대응한다. 왕은 어이가 없어진다. "이럴 수가…" 클수록 '속 빈 강정'이란 딸의 진언이었으나, 알 리 없는 왕은 일언지하에 코딜리어를 내쫓는다.
서울은 리어의 왕국이다. 그의 입김이 곳곳에 서려있고, 입김에 밀린 코딜리어들은 힘없이 엎드린다. 별 개성 없는 엇비슷한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섰고, 많아야 좋을 나무들은 다 사라졌다. 가는 지 서있는 지 모를 차들이 온 거리에 뒤범벅으로 섞여 있는가 하면, 이름도 생경한 '입(立)'간판이 어느 날 갑자기 인도(人道)이기를 이미 포기한 인도에 쐐기를 박고 선다. 하다 못해 쓰레기조차 풍성한 곳이 서울이니, "없는 게 없다"는 감탄(?)이 절로 날 밖에. 곁가지 같은 얘기지만, 서울에 뭐가 하나 생기면 그게 또 얼마나 재빨리 전국으로 퍼지는지, 그 민첩함에도 혀를 내두르겠다. 이러다 보니 한국은 어딜 가도 서울인 듯한 느낌 아닌가. "최소한의 가짐에 만족하고, 새처럼 가볍게 날고픈"이란 소비자운동가 송보경씨의 말이 이래서 안타깝게만 들린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정진호의 매일내일(每日來日)] 3·1절에 돌아보는 극우 기독교 출현 연대기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김세환 "아들 잘 부탁"…선관위, 면접위원까지 교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