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오전 대구의 한 초등학교 4학년 '영어로 하는 영어 수업' 시간. 'Good morning!'이란 인사와 함께 수업이 시작됐다. 제법 많은 말들이 영어로 건네지고 있었지만, 겨우 노래하고 게임하며 박수치라고 하는 정도만이 영어였다. 대부분 수업은 우리말로 진행됐다.
웬일일까? 교육부는 새학기부터 초교 3.4학년과 중1 영어 수업을 영어로만 진행하겠다고 분명히 밝혔는데 현장은 왜 이럴까? 수업이 끝난 뒤 교사는 힘겹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로만 하라고요" 말도 안됩니다. 교사들도 아직 능숙하지 못하지만 아이들은 더 합니다. 간단한 교실영어를 우습게 아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영어만 들리면 고개를 외로 꼬는 아이들도 적잖습니다. 한 교실에 40명이나 있는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했는지 이상할 뿐입니다.
영어과 전담 교사가 있는 학교는 그나마 낫다고 했다. 대구시내 초교의 영어과 전담교사 비율은 56%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학교에선 담임교사가 맡는다. 영어에 다소 자신 있는 다른 반 담임선생님과 교환 수업을 하는 학교도 2.8%나 된다. '영어로 하는 영어 수업'은 커녕, '우리말로 하는 영어수업'조차 벅찬 것이다.
중1 교실은 사정이 더 나쁘다. 교사부터 학생까지 워낙 천차만별이기 때문. 이들은 초교 3년 때부터 영어를 배운 첫 학년이다. 5년째 영어를 배우는 것. 때문에 학생들 사이의 실력차가 너무 크다. 초교 때 영어 공부를 소홀히 한 학생이 있는 반면, 원어민 강사가 있는 학원을 몇년이나 다녀 유창한 회화를 구사하는 학생도 더러 있다.
새학기가 시작될 즈음, 중1 영어교사들은 나름대로 비장한 각오를 했다고 했다. 첫 케이스인 만큼 열심히 한 번 해보겠노라고. 그러나 막상 수업이 시작되자 고민에 빠졌다. 학생들 사이의 너무도 큰 실력차에 혼란돼 버린 것. 소선여중 권재인 교사의 말. "간단한 영어를 말해도 제대로 알아듣는 학생은 40명 중 10명 안팎에 불과합니다. 절반은 멀뚱멀뚱 얼굴만 쳐다 보지요". 어쩔 수 없이 우리말로 해석해 줘야 고개를 끄덕이고 다음 과정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교사들은 2배로 힘이 드는 셈이지만, 학생들의 수업 열의는 오히려 떨어지는 상황이다.
사실 올해 중1은 7차 교육과정이 시작되는 학년이라 교사들 사이에 기피 학년이 돼 있다. 때문에 중1을 맡는 것만으로도 영어에는 그만큼 자신이 있거나 열정이 높은 것으로 봐 줘야 한다고 교사들은 말했다.
한달도 채 안돼 '영어로 하는 영어수업'에 지쳐버렸다는 교사들은,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연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발적으로 모여서 연구하는 교사들도 많아 비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대구 외국어고 강우식 교사는 "잘 안된다고 떠들면 결국 학원만 좋은 일 시키고, 학부모들 사교육비 부담도 늘린다"고 경계했다.
현장이 이렇게 돌아가는 데도 교육부는 별 반응이 없다. 전국 초중고 영어교사 중 7.5%만이 영어 수업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통계나 읊어댈 뿐이다. 그러고도 내년에는 중2.고1, 2003년에는 중3.고2 등으로 확대하겠다고 한다.
현실을 알면서도 억지 추진되는 교육 정책 때문에 교사들은 무능자로 찍혀 자존심을 다치고, 학생들은 학원으로 내몰리고 있다.
김재경기자 kjk@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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