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유림(柳林.1894~1961) 선생의 무정부주의 활동에 대한 재조명작업이 활발하다.
유림 기념사업회와 한국아나키즘학회가 4월 2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일제시대 아나키즘 운동가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단주(旦州) 유림의 활동상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날 대회에는 안동대 김희곤 교수와 부산대 김성국 교수(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등이 주제발표자로 나서 단주의 항일투쟁과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활동에 대해 집중적으로 토론할 예정이다.
김희곤 교수는 미리 제출한 '단주 유림의 독립운동' 주제발표문을 통해 "일제강점기 아나키즘이라는 제3의 길을 걸은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단주를 평가하고, 무정부주의자이면서도 민족혁명을 이루기 위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무조건 단결해야 한다고 주창한 배경 등을 짚었다.
김 교수는 대구와 안동에서 부흥회, 자강회 활동을 펴오던 단주가 1919년 3.1운동 후 만주로 망명, 활동무대를 옮긴 후 북경과 상해, 성도에서 활동하던 1926년까지를 아나키즘을 수용한 시기라고 분류했다. 1921년 단재 신채호를 도와 북경에서 '천고(天鼓)'발간에 참여하는 등 그로부터 아나키즘을 접하면서 본격적인 아나키즘 활동에 참여했고 이후 단주는 성도사범대에서 수학하면서 상당한 이론으로 무장한 아나키스트로 성장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당시 무정부주의 운동의 거물이었던 단주가 아나키즘 단체활동에 있어서는 늘 주류에서 비켜나 있었다"고 김 교수는 주장했다. 1929년 평양에서 단주를 주축으로 결성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이나 전조선흑색사회주의운동자대회, 교육사업인 의성숙(義誠塾) 창립 등 국내 아나키즘 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일경에 체포되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단주가 주도적인 입장에 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편 김 교수는 "2차 망명길에 오른 1937년부터 임시정부에 가담한 42년까지를 단주의 활동상에서 가장 식별하기 어려운 시기"라고 밝혔다. 그러나 전면적인 항일전쟁의 필요성을 느껴 1941년 무렵부터 아나키스트 그룹이 임시정부 외곽에 포진하면서 단주도 42년 10월 중경 임시정부에 참여, 비록 무정부주의자였지만 민족해방이라는 명분아래 연합노선을 걷게된 배경을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김 교수는 단주의 독립운동의 특징에 대해 항상 주변부적인 색채를 지녔고, 공산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항상 결합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 아나키스트로서 국가기구를 부정했지만 점차 국가기구를 인정하고 참여했다는 점 등을 손꼽았다. 단주는 당시 항일투쟁 세력에 있어서 소수였던 아나키즘 노선을 걸었기 때문에 늘 비주류의 불행한 운동가였다는 게 김 교수의 시각이다.
서종철기자 kyo425@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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