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日 역사바꾸기 과정

일본의 교과서 역사 왜곡은 그 시발점이 사실상 반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950년대 중반 일본내 재군비론 등장을 계기로 우익 진영이 당시 교과서의 '침략' 기술을 문제삼아 대대적인 반격을 가했던 것이그것이다.이른바 우익의 '1차 교과서 공격'이다.

'새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선봉으로 한 우익의 이번 교과서 역사 왜곡책동은 3차 교과서 공격에 해당한다.2차 교과서 공격은 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에 걸쳐 그야말로 파상적으로 전개됐고 그 결과는 한국, 중국 등 주변 당사국의 거센 반발을 자초했던 1982년의 '교과서 파동'으로 이어졌었다.

이처럼 전후 일본의 교과서 문제는 각각 3차례에 걸친 우익 진영의 공격과, 이에 맞선 일본내 양심세력 및 한국, 중국의 공동 방어 등으로 점철돼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한마디로 역사의 시계추처럼 한 쪽이 밀리면 다시 공격을 가하고 다른한 쪽이 밀리면 반격을 가하는 싸움의 연속이었다.

전후 일본 교과서의 역사 기술이 처음부터 뒤틀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일본 역사교육자 협의회의 이시야마 히사오(石山久男) 사무국장에 따르면 패전 직후 일본교과서에는 비록 그 내용은 충분하지 않았지만 일본군이 난징(南京)에서 자행했던잔학 행위에 대한 기술 등이 있었다.

우익의 1차 교과서 공격은 바로 여기서 시작됐다.일본의 재군비와 자위대 창설을 낳은 1953년의 '이케다-로버트슨' 회담이 공격의 구실로 이용됐다.재군비 정당화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위해 우익 정치인들이 당시의 이같은 교과서 기술을 문제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에 맞서, 우리가 통상 '일본내 양심세력'으로 부르고 있는 이른바 '호헌파'진영의 반격이 시작된 것은 60년대 중반이었다.최근 2001년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郞.87) 도쿄 교육대 교수가 자신이 집필한 교과서에 대한 문부성 검정이 부당하다며 검정 불합격 처분 취소 등을 요구하는 1,2차 소송을 65년과 67년 제기한 것이다.

이 '이에나가 소송'을 계기로 교사, 학부모, 시민, 연구자, 문화인, 출판 노조 등을 중심으로 교과서의 역사 왜곡 시정 등을 위한 반격이 전국적으로 전개됐고, 그 결과가 '검정 불합격 처분 취소'라는 이에나가 교수의 승소 판결(1970년)로 나타났다.이 판결로 문부성의 교과서 검정에는 제동이 걸렸으며, 침략 전쟁 등 일본의 가해 사실이 교과서에 등장하게 됐던 것도 이에나가 소송 덕택이었다.

일본의 가해사실을 부각시킨 교과서 기술에 위기감을 느낀 우익 정치세력과 재계, 승공(勝共)연합 등이 이른바 2차 교과서 공격에 나섰다.심지어 자민당은 가해사실 등을 기술한 교과서를 아예 추방하기 위해 '교과서 통제 법안' 국회 상정까지 추진했다.

문부성이 '침략'을 '진출'로 바꿔쓰라고 지시한 사실이 드러나 외교 문제로 비화됐던 82년의 교과서 파동은 바로 이 과정에서 나왔다.

우익 진영의 2차 공격에 대한 반격은 한국, 중국 등 당사자들이 앞장선 것이 특징이었다.일본 정부는 교과서 검정 문제가 한일, 중일 관계를 위협하는 외교 문제로 번지자 '근린제국 조항'이라는 정치 외교적 타협안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고, 교과서에 '침략'이라는 용어도 어쩔 수 없이 허용했다.

'새 역사 교과서…모임'을 앞세운 우익의 3차 교과서 공격은 96년 중반부터 본격 개시됐다.'종군위안부' 기술 삭제 요구로 시작된 이번 공격은 근린제국 조항이라는 국제 공약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던 교과서 파동 굴복에 대한 대반격이자 총공세의 성격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셈이다.(도쿄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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