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말에세이-건망

내 의식에는 분명 찾아왔는데 사진이 없다. 총회 기념이라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여서 있을 만한 곳은 다 살펴도 보이질 않는다.

필름조차 없음이 확인된다. 그래서 현상소를 찾아갔다. 주인은 왜 이제 오느냐는 표정으로 사진이 들어 있는 봉투를 내민다. 사무실에서만 찾느라 이틀이 지났으니 그럴만도 하다.

소년 시절, 서당에서 책거리를 할 때는 한권의 책을 훈장께 외워 바쳐 학우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후 직장에서 근무할 적에도 고객의 현황을 장부 보지 않고 지적할 정도여서 요령 피우는 직원의 오금을 박곤 하였다.

##기억상실에서 오는 불안

헌데, 언제부턴가 읽었던 글의 내용을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건망이 생겼다. 며칠 지나면 제목까지도 아뜩할 때가 종종 있다. 현대인의 성공비결은 첫 만남을 인상 깊게 심는 것과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라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비즈니스의 낙제생이다. 지금 그 건망의 끝에 이른 듯하여 내 자신도 믿을 수 없는 허탈감에 씁쓸한 기분이다.

현대 의학에서는 기억력 감소, 즉 건망은 술과 담배로 인해 뇌 기능이 저하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면 내성적인 성격에서 오는 현실에 대한 불만, 스트레스, 과로에 의한 정신적인 강박관념으로 심한 기억력 저하에 빠질 수 있다는 진단이다그러나 술과 담배는 나와 인연이 없는 기호품이다. 그러면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오는 불안과 갈등이 문제일까. 그 감정적 요인들에 의해 기억 기능이 방해를 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은혜는 자꾸 잊고 원망만 기억

미당(未堂)은 늙어가는 기억력의 침체를 막기 위해 아침마다 1천628개의 산 이름을 소리내어 외웠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만한 끈기가 없을 뿐더러 이미 쇠퇴해진 기억 감소 현상이 회복될 리 만무하다.

기억이야말로 과거를 되살려 진취적인 생활을 펼칠 수 있는 삶의 활력소일 것이다. 그런데 그 뇌 기능이 빗장 풀린 곳간이 된 요즘 불편함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떤 것을 설명하다 증명해야 할 단어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민망할 때가 허다하다.

뿐만 아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않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은 곧잘 잊어버린다. 안타깝게도 원망스러운 것은 크나 작으나 당연히 잊어야 하는데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은혜는 작은 것이라도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얼마 안가서 잊어버리고 만다.##삶의 때 지우는 연습 되길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건망이고 되살릴 수도 없는 기억이다. 불가에서는 조금 전에 들었던 큰스님의 법문조차도 집으로 돌아갈때는 마음에 두지 않는 게 지혜로운 삶이라 하였다. 맑고 깨끗하게 걸림이 없는 마음밭이라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속인으로서 가당치도 않은 희망이기에, 지금의 이 건망은 이승을 가볍게 떠나기 위한 연습이라 자위하고 싶다. 이승에서 겪는 일 어찌 다 기억하며 어떻게 떠날 것인가.

그러므로 복된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기억의 상실에 불안해하기보다 순간적으로 놓치기 쉬운 현실 판단의 결여를 마음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남의 눈치를 보느라 정의감이 없고, 권위나 체면을 앞세운 몰염치를 염려하는 게 휠씬 지혜로운 삶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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