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자식도 버리는 매정한 풍토속에서 평생 남의 아이들을 친자식처럼 돌보며 수도자같은 삶을 살아온 여성들이 있다. 대구 SOS 어린이마을의 '은퇴' 어머니들. 그들은 청춘을 바쳐 30명 내외의 자식들을 키우고, 이제는 어머니 역할에서 물러나 봉사하며 산 지난 삶을 돌이키며 애잔한 노후를 보낸다.
대구시 동구 검사동 대구 SOS 어린이마을의 한켠에 자리잡은 은퇴어머니들의 집(053-983-3154). 활짝 핀 벚꽃이 손님을 반기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빨간 벽돌로 지어진 단층집 두채〈사진〉가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은퇴어머니들을 위한 집이다. 정갈하게 봉사하며 살아온 삶을 느낄 수 있는 아담한 뜨락을 지나면 은퇴어머니들이 사는 방. 은퇴 어머니 한명이 한 칸씩 쓰는 세 평 남짓한 검소한 방에는 오래된 TV와 몇권의 책자, 누군가에게 줄 뜨개옷 등이 살림살이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한명당 6, 7명 돌봐
20대 전후에 가족들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을 키울 '양육 어머니'로 들어와 30년 이상 그들을 돌보다 55세를 전후해서 기력이 달리면 이 일에서 물러난다. 미혼으로 살며 혈육을 잃어버린 6, 7명의 아이들과 함께 일반 가정처럼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사람끼리 섞여사는 평범한 인간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1963년 5월에 설립, 올해로 38년째인 대구 SOS 어린이마을에서 은퇴한 어머니는 모두 13명. 이 가운데 8명이 설립과 더불어 아이들 돌보는 일을 시작, 은퇴 어머니의 삶이 곧 어린이 마을의 역사로 남아 있다.
◈월급명목 돈도 생활비로
지난 2월, 몸이 안좋아서 조금 일찍 은퇴한 서순난(52)씨는 지난 65년부터 79년까지 식당에서 자원봉사를 해온 언니 서분조(72)씨의 뒤를 이어 어린이마을에 들어와 평생을 아이들 뒷바라지에만 헌신한 삶을 묵묵히 살았다. 그렇다고 물질적 대가를 바랄 수도 없다. 평생 무료봉사를 해오던 SOS마을어머니들에게 지난 86년부터 월급이라는 명목으로 약간의 돈이 주어졌지만 이마저도 아이들 뒷바라지에 다 쏟아붓는다.
"함께 부대끼며 살면 그게 바로 내자식이지요. 어떻게 학원에 갈 아이들 교육비를 안줄 수 있습니까. 돈이 중요한게 아니라 오직 생명이 소중하고, 인간답게 사는게 소중할 뿐이지요"
키우는 자식들의 용돈과 교육비, 모자라는 생활비로 대부분 월급을 써버려 노후 여유자금이 한푼도 없고, 변변한 옷 한벌 사입지 못하지만 그래도 SOS마을의 은퇴 어머니들은 당당하게 이 길을 택하고, 후회없이 살아왔다.
"아이들 먹다 남긴 밥도 다 긁어먹지요".
보통 어머니들처럼 자식농사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이들 13명의 은퇴 어머니들이 키워낸 자식들은 400여명. 이 가운데는 대학교수와 정부 고위간부 등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저명인사들도 여럿 배출했다.
"평균 1명의 은퇴 어머니가 30여명을 키워내니, 우린 누구보다 자식복이 많은 셈이지요"
그러나 아이들이 인생의 전부인 은퇴 어머니들의 삶에는 기쁨만큼 시련도 많다. 최해련(66) 은퇴 어머니의 경우 20년 전 큰 딸을 잃었다. 지난 64년 어린이마을에 와서 처음으로 받은 핏덩이를 곱게 키워 시집 보냈으나 아이를 낳다 불귀의 객이 되었다.
"큰 딸을 잃은 슬픔에 3일 밤낮 식음을 전폐했더랬습니다".
최씨는 남은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처럼 많은 자식들을 키우느라 은퇴 어머니의 속은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변한 지 오래이고, 상당수가 고혈압, 협심증 등 크고 작은 병을 가지고 있다.
◈'은퇴'휴식아닌 새출발
"은퇴는 휴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일 뿐입니다"
봉사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온 은퇴어머니들은 여전히 사회단체에서 봉사활동을 계속하며 사회를 향한 어머니의 손길을 따뜻하게 보내고, 출가한 자녀들의 출산과 같은 집안 대소사에 신경쓰느라 여전히 바쁘다.
"28살짜리 막내를 장가 보내느라 요즘 분주합니다".
최씨를 포함한 13명의 어머니들에게 은퇴는 홀가분함이 아니라 섭섭함으로 남아있다. 벌써 나이가 그렇게 되었나 하는 회한과 아이들과 씨름하며 흘린 눈물, 자식이 있어서 기뻤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진정한 사랑과 모정을 배우게 된 게 가장 큰 보람이었지요". 은퇴 어머니들은 평생 돌볼 아이들이 친남매들처럼 서로 돕고 사는 걸 대견해하며, 손자들의 재롱에 묻혀 시름을 잊는 여느 어머니의 모습과 같이 노후를 보낸다.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길을 택하겠습니다".
이경달기자 sarang@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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