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방에 있는 모 대학에서 개설한 최고경영자 반으로부터 강연을 부탁 받았다. 주경야독(晝耕夜讀)하는 분들인지라 듣는 열기와 정성이 놀라워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강연을 했다. 도중에 한 수강생이 두어 번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바람에 분위기가 약간 흐려진 것이 옥의 티였다. 그는 주위의 눈총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웃어가며 통화를 하는데, 그 얼굴에 안될 짓을 한다는 표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지난 8월에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했다. 여러 점에서 전에 살던 곳보다는 불편하지만 집 가까운 곳에 광교산이라는 좋은 산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산에 오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용기를 냈다. 조그마한 아파트지만 옮기고 보니 그런 대로 살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위층에서 가끔 쿵쿵거리는 소리가 간단없이 들려와 신경을 건드렸다. 소리의 정체를 알 수 없어 앞집에 사는 분한테 물어 보았더니 위층의 젊은 부부가 아이들을 위해서 DDR을 설치한 때문이라고 했다. 그 분은 몇 번 항의했다가 오히려 단독주택으로 이사가라는 핀잔만 들었다고 했다.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니 두고 봅시다. 그런 부모 밑에서 크는 아이들이라면 노는 데에도 끈기가 없을 것이니까요"
필자는 이런 말로 이웃 분을 위로하고 참기로 작심했다. 꿍꽝, 꿍꽝!
집 근처 골프 연습장에서 참으로 난감한 장면을 목격했다. 주차할 자리를 놓고 60대 후반의 한 노년과 40대의 건장한 한 장년이 시비를 벌이는데, 40대 장년이 노년에게 삿대질을 해가면서 퍼붓는 말투가 너무나 해괴해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 새끼, 곱게 늙어라, 그따위로 늙으니 늙은이 대접을 못 받지 등등의 원색적인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데, 나이는 그만 두고라도 전후 사정으로 보아서 노년이 그런 말을 들을 짓을 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가 얼굴을 붉히고, 노년은 힘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상을 짓는다. 보다 못한 내가 한 마디 했더니 장년은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너무 오래 산 것이 죄이지, 노년의 한탄이었다.
그 후로 연습장에서 그 장년의 모습이 보이면 길을 돌아서 가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얼굴을 돌린다. 자꾸 헛구역질이 난다.
해동과 함께 산에 오르는 시간을 좀 바꾸었다. 새벽에 산에 올랐다가 출근하는 분들이 하산한 다음, 비교적 한산한 때를 고르려한 것이었는데, 결국 그 시간도 바꿔야했다. 그 시각에 어림없이 나타나는 70대의 한 노인 때문이다. 엄청나게 건장해 보이는 이 노인은 언제나 라디오를 들고 산을 오르는데 산이 찡찡 울리도록 볼륨을 크게 틀어 놓는다. 잠시라도 세상과 떨어져서는 살지 못하는 저 늙은이가 죽을 때는 어찌 죽을꼬. 그것은 그쪽의 문제이니 내가 상관할 바 아니나 산에 올라와서도 라디오를 통해서 보기도 그 음성을 듣기도 싫은 자들의 요설(饒舌)이 아니면 유행가를 듣자니 미칠 지경이다.
사람과 사귀는 것도, 만나는 것도 점점 겁이 나고 싫어진다. 가만히 들어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아니면 사색에 잠기는 도리밖에는 없는데, 사색에 잠기더라도 행여 아침에 읽었던 구역질나고 분통터지게 하는 신문기사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결국 자기 속으로만 빠져들어 한없는 깊이로 침잠할 수밖에 없으니 이것이 혹시 자페증(自閉症)의 시작은 아닌가 하여 때때로 겁이 난다.
이웃으로 하여금 자페증을 앓도록 한 구석으로 몰아넣으면서도 눈 하나 깜박 않고 태연자약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우리 사회이다. 내가 하는 짓이 부끄러운 짓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려고도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우리나라이다. 백성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 것이 다스림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했건만 다스리는 분들은 본말은 제쳐두고 잔재주와 속임수만 가르쳐 백성을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하등 인간으로 전락시키면서도 좋아라고 낄낄거린다.한양대 교수·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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