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시론-민주시대의 사람값

스물 한 살의 여성이 학원등록금과 휴대전화 요금을 내려고 사채업자한테 돈을 빌렸다. 이자는 원금의 배. 150만원 빌리고 한 달에 이자만 그 만큼을 갚아야하는데 보통 사람이라면 당장 죽는다 해도 빌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돈을 갚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해괴한 각서를 쓰게 했다. '신체포기각서'라는 것이어서 내 몸을 돈 주인에게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넘기는 것이다. 바로 이 각서 때문에 그 젊은 여성은 메이크업 전문가로의 꿈도 피워보지 못하고 '팔렸다'. 이 사건의 내면에 깔린 폭력적이고 살인적인 범죄적 성격은 도저히 말로 할 수가 없다. 다만 누구든 이 사건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인간성을 망가뜨렸는지 헤아려야 할 것이다.

'원조교제'라는 말. 꽤 오래 되었다. 나이 든 남자가 경제력이 없는 여성을 골라 성 관계를 맺거나 그런 관계를 지속하면서 돈을 지불하는 행위에 대해 일컫는 말이다. 경제력이 없는 여성으로는 중학생에서 대학생까지가 일반적이다. 돈을 주고 성을 사고 돈을 받고 성을 판다는 의미에서는 매매춘과 다르지 않다. 예전의 매매춘은 그것을 업으로 하는 일정한 장소가 있었고 그것을 업으로 삼아 먹고사는 포주라는 업자에게 고용된 창녀가 있었다. 원조교제는 그런 구조를 깬 자유롭고 독자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매매춘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번에도 그런 경로를 통해 어린 여학생과 성관계를 가진 젊은 남자들이 법망에 걸려들었다.

여성의 존엄성은 '어머니'이기 때문이며 어머니 없이 인류는 존재할 수 없다. 매매춘은 바로 그 어머니에 대한 가치의 능멸이며 인간 존재에 대한 모독이다. 남성이 여성의 성을 삼으로써 자기 존재의 고향에 대한 모욕을 경험하고, 여성은 성을 팔아버림으로써 자기 존엄성을 방기한다.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 다 같이 존재에 대한 가치를 포기하는 사회의 미래를 생각해보자.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한 인생의 청춘들. 요새 일자리가 없다. 어렵사리 취직을 했는데 수습이라고 월급을 40만원 받는다. 그나마 이것저것 떼고 38만원이다. 그 돈으로는 교통비와 점심 값이 나오지 않는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결혼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38만원 짜리 월급쟁이가 되었다. 월급봉투를 받아든 우리 사회의 미래의 주인공들의 '환멸'을 상상해 보라. 대학생 때 과외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그것보다는 더 많은 돈을 받았다. 사회에 나와 그 동안 배운 것을 당당하게 써먹고 싶은 우리 아들과 딸들. 아마 그들은 성장이 싫을 것이다. 어른이 되는 게 역겨울지도 모른다. 이토록 젊은이로 하여금 성장하기 싫고 어른이 되는 게 두려워지도록 만드는 사회에 대한 책임은 어디 있는가.

아침에 배달 된 신문에서 이런 사진을 보았다. 웃통을 벗은 사람들이 땅바닥에 아무렇게 나 누웠고 그 위로 곤봉을 든 경찰이 폭행하는 장면. 사진 설명은 이랬다. '마치 개 패듯…'.

그 사진 밑에 다른 기사가 있었다. 해고된 노동자 남편을 가진 세 살 짜리 아들을 둔 여성의 외로운 시위에 대한 기사였다. 93년에 취직해서 올 2월에 쫓겨날 때까지 남편이 받은 최저 임금은 55만원. 최고 임금은 80만원이었다. 부인은 밤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부업을 해서 한 달에 10만원을 벌었다. 이렇게 살았는데 그나마 남편이 강제로 해고 된 것이었다. 어린 아들은 엄마아빠라는 말 다음으로 투쟁이라는 말을 배웠다고 그 부인이 말했다. "스무평 짜리 아파트에서 가족들이 오순도순 지내는 게 결혼 때 꿈이었어요. 그 꿈이 욕심인가요?" 그 부인이 말했다.

인류가 지향해온 정치 체제 중 가장 인간답다는,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제도. 그리고 건국이래 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 그 성숙도와 이런 종류의 '사람값'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살아야 하는가. 지금, 만물이 잉태의 절기를 맞아 그 기운이 넘쳐나는 때, 나는 부끄럽고 부끄럽다. 이경자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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