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청암사 그리고 수도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지난 겨울. 모두 쌓아 두었다면 1m70㎝는 족히 넘었을 것이라고 수도암 아랫동네 사람들은 말한다. 암자에서 마을 초입까지는 약 1.5㎞. 눈이 내린 날이면 새벽예불을 마친 스님들이 어김없이 암자에서 동네 어귀까지 밤새 내린 눈을 치워놓곤 했다고 한다. 주민들이 눈만 보면 넌더리가 난다고 푸념할 때 스님들은 제설작업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는 이야기다. 사람의 향기. 이 깊은 산속에도 사람이 있음을, 그 온기가 눈을 녹여내는 것을 보여준 것일까.

'산사의 봄은 어떤 빛일까'. 대구를 벗어나 서쪽으로 낙동대교를 지나면서 만나는 들판은 푸른 빛 봄이 완연하다. 성주군 일대 참외·수박 비닐하우스는 햇살에 반짝여 거대한 은빛 호수 같다. 새로 길을 넓힌 30번 국도를 1시간 30여분 달리니 성주댐이다. 대가천을 따라 증산면 소재지에서 청암사 표지판을 보고 핸들을 꺾는다.

4, 5년전만해도 비포장이었을 초입길을 만만하게 오른다. 그러나 수백년은 먹었음직한 소나무·전나무가 찾는 이를 이내 숙연하게 만든다. 140여명의 불제자들이 전문수업을 받는 승가대학치고는 너무 조용하다. 산새 소리, 계곡 물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 그러나 기대했던 비구니 스님들의 낭랑한 강경(講經) 소리는 없다.

디딤돌 위에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눈에 들어온다. 스님을 불렀다. 차를 한 잔 내놓는다. 주지스님은 출타중. 방안이 먼지 한 점 없이 정갈하다. 앉은뱅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찻잔을 건넨다. "학승들은 모두 어디 갔습니까". "지금은 방학중입니다".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눈푸른 비구니스님이란 무슨 말입니까". "공부에 전념하는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스님이란 뜻이겠지요". "피서철엔 사람들이 번잡하지 않습니까". "그냥 둘러만 보고 가는 것은 좋으나 사진찍고 떠들고 하는 것은 보기에 안좋지요". 두서없는 질문에 만면의 미소로 대답한다. 어쩐지 아직 점심 전이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는다.

청암사에서 불령동천(청암)계곡을 내려오다 발길을 멈추고는 다시 올려다 본다. 쭉쭉 뻗어오른 거목과 하늘을 뒤덮은 여린 샛가지들. 그윽한 고찰의 향기와 세월의 무게를 알고 있는듯 늠름하고 창창하다. 경내 여기저기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이름과 시구들은 이곳이 얼마나 명승인가를 웅변하는 듯하다.

길을 되밟아 오던 길 삼거리 평촌슈퍼에서 수도암으로 오른다. 산비탈엔 이곳 특산인 담배를 재배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환하게 웃으며 우리 일행에게 '잘 오셨다'고 눈인사한다. 암자까지는 약 7㎞. 어디에 견주어도 뒤지지않을 비경이 자랑거리인 수도계곡이 이어진다.

2㎞정도 올라가면 와룡바위. 한여름이면 자리다툼이 끊이지 않는다는 곳이다. 수십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 널찍하다. 조금더 올라가면 용소폭포. 흘러내리는 물살이 제법 세차다. 가만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세상 근심도 금세 날아가고 말 것 같다.

수도산(불영산·1360m) 산정부에 자리잡고 있는 참선도량 수도암(1050m). 정면으로 가야산 자락이 보인다. 구름위에 앉은 듯 아늑한 느낌이다. 마침 주지 원만 스님이 나오신다. "마음이 떠있던 수도승들도 이곳에선 가라앉게 돼 수행에 정진할 수 있다"며 "선방스님들은 대개 3달정도 머물지만 하루 한차례 공양, 3년결사로 들어와 19년째 정진중인 분도 있다"고 귀띔한다.

산기슭마다 드문드문 진달래와 이름모를 꽃들이 피어나고 있다. 아직 겨울빛이 더 짙다는 느낌이 들 즈음, 문득 봄은 산사의 스님들과 산골 농부들의 얼굴에까지 찾아와 있음을 본다.

노진규기자 jgroh@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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