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신부님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로 들어서지 않고 국도로 길을 잡았다. 라일락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면 좋지만 안되면 야산에 진달래 피어 있는 거라도 보고 호수를 만나면 잠시 물 구경도 하면서 가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저녁 무렵 비산비야의 낮은 구릉 위에 열 지어 선 나무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교차하고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섬세한 풍경은 발걸음을 붙잡곤 했다.
그러다 생각해보니 언덕위에 줄지어선 나무들의 모습이 아름다운 건 그 나무들뒤에 말없이 배경이 되어 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뭇가지들의 세세한 곡선과 균형, 멋들어지게 휘어진 모습으로 자라 온 나무들의 지난 생과 그것들의 무난한 어울림, 자잘한 잎새의 떨림과 흔들림까지 빠짐없이 보여주는 빈 허공이 없다면 나무들은 그렇게 빛나지 않았을 것이다. 빽빽한 숲속에서는 그런 것들이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어찌보면 허공 때문이다. 나무들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려면 허공까지 포함해서 보아야 한다. 허공, 비어 있는 여백이야말로 아름다움을 이루는 중요한 공간인 것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야말로 참이라고 했다. 허공이 곧 하느님이라고 했다. 형태도 모양도 없이 계시는 분이 하느님이라고 했다. 염화미소를 바르게 깨달으려면 꽃만이 아니라 꽃 밖의 허공을 보라는 것이다. 꽃과 허공이 마주치는 아름다운 곡선을 보고도 꽃만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꽃을 있게 하는 것은 허공이라는 것이다.
조각작품도 마찬가지다. 조각의 실공간을 뒤에서 받쳐주는 빈 공간까지 합쳐서 우리는 그 작품을 감상한다. 그것을 네거티브 스페이스, 허공간이라 한다. 허공간 그 자체가 조각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는 작품들은 그 허공간이 막혀 있다. 제대로 된 자기 자리를 잡아 서 있는 것 같지 않다. 거대한 빌딩에 가려져서 왜소해보이거나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어딘가 동떨어진 모습으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조각작품의 뒤를 받쳐주는 여백을 만날 수 없어서 꽉막힌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다보탑의 아름다움은 탑의 아름다움만이 전부가 아니다. 탑 뒤의 나무그늘과 그너머 푸른 하늘까지 포함해서 다보탑인 것이다. 절 집의 아름다움이 건축 하나만 똑 떼어내서 아름답다 하지 않는다. 추녀까지 내려가는 비스듬한 사선과 뒷산의 능선이 조화를 이룬 모습까지 포함해서 아름답다고 한다.
사람도 여백이 있는 사람이 인간답게 느껴진다. 빈틈이 없고 매사에 완벽하며 늘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보다는 어딘가 한 군데는 빈 여백을 지니고 있는 듯해 보이는 사람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뒤에 언제나 든든한 힘과 막강한 무엇이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보다는 텅 비어 있는 허공이 배경이 되어 있는 사람이 인간다운 매력을 준다.
여백이 있는 풍경이 아름답듯 여백을 지닌 사람이 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닐까. 욕심을 털어 버린 모습으로 허공을 등지고 서 있는 사람이.
〈시인〉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