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식육점에서 고기를 사면서 "몇 근 주세요" 하거나, 신문에 아파트 분양 광고를 내면서 '××평형'으로 썼다가는 50만~150만원의 과태료가 매겨질지 모르게 됐다. 정부가 단속하겠다고 나선 것. 그러나 시민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어떻게 한다는 얘기?=산업자원부는 몇 자, 몇 근, 몇 되, 몇 평 등의 단위를 쓰지 못하게 할 예정이다. m.gℓ.㎡ 등 SI 기준을 따르라는 것. 이를 위해 1964년에 만들어졌다가 사문화돼 온 '계량에 관한 법률'을 37년만에 다시 꺼집어 냈다. 이미 올 들어 척관법을 잣대로 한 계량기의 제작.판매는 단속하기 시작했다. 오는 7월1일부터는 더 강화, 사용하는 사람도 단속, 처벌할 예정이다.
그러면서 다른 나라도 이렇게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은 작년 1월부터 SI단위 사용법을 확정해 사용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은 1998년에 "모든 문서에는 SI단위를 사용하라"고 규정하고, 그렇잖을 경우에는 반드시 SI단위를 병기토록 했다는 얘기. 일본은 1999년 10월부터 SI 단위만 사용토록 했다.
SI단위란 프랑스어 표기인 Le Systeme International d'Unite's를 줄인 것. 영어로는 The International System of Units, 우리 말로는 '국제단위계'로 번역된다. 제11차 국제 도량형 총회(1960년)에서 채택됐다.
◇왜 이럴까?=우선 정부는, 척관법에 따를 경우 지역별로 통일성이 약해 헛갈리는 것을 문제로 제기한다. 1근의 경우, 소고기는 600g, 포도.딸기는 400g, 채소는 375g로 서로 다르게 통한다는 것이다. 한 마지기는 경기도에선 150평, 충청도는 200평, 강원도에선 300평을 나타낸다.
둘째, 우리가 관습적으로 쓰는 척관법은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아 한계가 있다고 정부측은 주장한다. 국제적 통용만이 중요하다면 물론 당연해 보일 수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척관법은 오랜 세월 사용돼 와 몸에 익었을 뿐 아니라, 그걸 확립하는데도 엄청난 국력이 투입됐던 것들이다. 척관법은 삼국시대부터 사용, 백제의 '도시부'(都市部), 신라의 '시전'(市典) 등 감독 관청을 둬 체계를 확립하려 애썼다. 조선에 와서는 세종대왕이 독자적인 도량형기를 제작했고, 후기 고종 때이던 1902년엔 '도량형 규칙'을 제정해 법제화했다.
또 척관법에는 생활의 지혜와 오랜 세월이 묻어 있기도 하다.
길이를 나타내는 자(尺)의 경우, 손을 폈을 때 엄지 손가락 끝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를 기준으로 제정됐다. 처음에는 18cm 정도였으나 고려.조선시대에는 32.21cm로 늘었다가 1902년에 30.303cm로 통일됐다. 일부에선 팔목~팔꿈치 사이의 길이라는 이야기도 하고, 서양에서 쓰는 피트(feet)의 단수형과 길이가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해 발 길이에서 나온 것 아니냐 생각하기도 한다.
평(坪)은 사람이 큰 대(大)자로 누울 수 있는 넓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홉'은 목이 말랐을 때 한꺼번에 마실 수 있는 물의 양이며, '마지기'는 한 사람이 하루 걸려 쟁기질 할 수 있는 넓이 혹은 일정 양의 곡식이 나는 면적을 말한다는 얘기가 있다.
◇시민들의 반발=상인들의 불만이 특히 높다. 쌀 한되, 삼베 두필, 소고기 세 근, 금 닷돈…이 더 잘 통하는데 왜 이러느냐는 것.
안동 신시장에서 식육점을 하는 최성동(42)씨는 "오랜 관행을 억지로 바꾸려 하지 말고 경기 되살릴 법이나 만드는 것이 더 급하다"고 비꼬았다. 포목점 윤지순(32)씨는 "옷감을 팔 때 마.자.치를 못쓰면 옷감 길이를 짐작할 수 없어 파는 사람 살 사람 모두 헛갈려 거래조차 어려울 게 뻔하다"고 했다.
안동 간고등어를 생산하는 류영동(42)씨는 "'고등어 한손'이라는 말에는 어른 한 웅큼으로 쥘 수 있는 생선 2마리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그런 체질화된 전통문화조차 말살하려는 것이냐"고 했다. 안동포를 생산하는 우복인(70) 할머니는 "필을 단위로 해 3, 4년 쓸 포장 상자를 만들어 뒀는데 이걸 어쩌느냐"고 했다. 안동대 민속학과 한양명(42) 교수는 "척관법에는 후덕한 인심이 스며 있는 만큼 함께 표기해 쓰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시행도 안되면서 혼란만 클듯
기획 부서인 산자부 표준.품질과 구재운(50)씨는 단호했다. "척관법을 만든 중국도 그걸 포기했는데 인터넷 시대에 우리가 굳이 고집할 이유가 있느냐".
그러나 현장 부서의 김남일 경북도청 과학기술과장은 곤혹스러워 했다. "국제화 시대에 발맞추려는 것이 정부 방침이니 만큼 시민들의 협조가 필요하나 강제 시행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안동시청 지역경제과 조풍제(38)씨는 "위반자가 적발되면 처벌이야 불가피하겠지만 오랜 관행을 어떻게 이겨 나갈지 걱정"이라고 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파운드.온스 같은 것을 못쓰게 한 뒤 영국에서도 큰 혼란을 빚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생명을 더 안전하게 해 주겠다고 강요하는 안전띠 매기조차 제대로 안되는 게 현실. 더욱이 수천년 몸에 익은 척관법 척결이 까딱 불만만 부른채 국력 낭비로 끝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권동순기자 pinoky@imaeil.com
정지화기자 jjhw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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