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동서원(대구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 배향돼 있는 김충선(金忠善)은 무슨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등을 돌리고 조선에 뼈를 묻었을까.
일본 소설가 고지카 지로는 역사소설 '바다의 가야금'(인북스 펴냄)을 통해 임진왜란의 최대 미스터리로 꼽히는 김충선 귀화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고 있다.
지로는 녹동서원을 몇차례 방문하고 일본의 고서적과 가문(家門)기록, 징비록, 조선왕조실록 등을 조사, 김충선을 히데요시의 화승총부대 장수 스즈끼(혹은 사이가) 고겐다이로 추정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김충선의 일본이름 사야가(沙也可)는 사이가(雜賀)의 한국식 표기로 보고, 그의 생애를 추적해 소설로 형상화했다.
사이가는 일본 전국(戰國)시대에 기슈(현 와카야마 현)지방 호족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때부터 무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군웅이 할거하는 시대에 화승총 한자루에 목숨을 걸고 여러 전장을 누빈 용맹한 장수였다.
아버지의 요구로 히데요시의 직할부대에 들어간 청년무사는 가야공주를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하고, 바닷가에서 그녀의 가야금 연주를 들으며 인생의 참맛을 느낀다.
사이가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맨처음 부산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가(少西行長)의 부대로 조선에 들어와 자신의 부대원 1백여명과 함께 귀화한다. 이 소설에서 그는 연인 가야공주가 히데요시의 음욕에 희생되자 이를 비관, 홍의장군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는 것으로 설정돼 있다.
그러나 실제 그의 귀화이유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일부 일본 사학자들은 아예 김충선의 존재자체를 부정해왔다.
그후 그가 임란에서 활약한 공로로 선조에게 김해 김씨와 정2품 벼슬을 하사받았고, 이괄의 반란과 병자호란에서 활약하는 등 죽을때까지 새로운 조국에 헌신했다는 기록은 남아있다. 김충선은 이웃나라에 대한 침략을 비판하고 조선민중에 대한 살륙을 거부했던 휴머니스트였던 것은 분명하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시끄러운 요즘, 400년전의 정의로운 청년무사를 만나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박병선기자 lala@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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